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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 부족하지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 돈도, 명예도, 그 무엇도 없었지만 그저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던 시기가 있었다. 성인 남자 4명이 있기에는 좁은 방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노래를 부르고, 무대를 꾸밀 구상을 상의하고, 조금 특별한 날에는 초라하지만 정겨운 포장마차에서 모여앉아 음식을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것처럼 우쭐대던 시기가 있었다.


종종, 그 시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윤택명훈] 행복을 주는 사람




슈퍼스타 K3 우승.

어 느정도 시나리오를 짜뒀었고, 정말 엄청난 노력을 통해 간신히 이룩한 결과. 처음부터 우승을 목표로 했었지만, 역시나 불안감이 없었던것이 아닌만큼 진정으로 다가온 그 결과는 행복했다. 그런 행복속에서도 명훈형은 언제나 얕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공인이 된다는게, 옳은 걸까? 언젠가.. 이 결정 후회하면 어쩌지?"



어두운 명훈의 모습에 내가 묻자, 명훈이 조용히 되물었다.



"광선아, 난 그게 걱정된다. 사실 나는 인기도, 돈도, 명예도, 모두 필요없었으니까."



조그만 몸임에도 너무나 어른스러운 형은 슬프게 웃었다.



"인기를 얻고, 명예를 얻고, 돈을 얻어도, 우리 멤버들이 없으면 난.. 그런거 전부, 필요없어."
"그건 승일형도, 윤택형도, 저도 마찬가지에요."
"... 응."





*





명훈형의 걱정은 괜한것이 아니었다. 우승을 한 우리에 대한 비방, 모함, 갖은 악플들. 특히 많은 것은 윤택형에 대한 것이었다.

암버프라던가, 거짓말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어떻게 살아있느냐는 그런 말까지.

윤 택형은 담담했다. 승일형은 화를 냈지만 그것은 한 순간일뿐, 아예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너무나 분해서 울면서 괴로워하는 나와는 달리 명훈형은 의외로 대범하게 행동했다. 사실 이해되지 않았다. 윤택형의 연인이면서 저렇게 담담할 수 있다는게.

명 훈형은 우리들 중 제일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윤택형의 소식을 들었을때도, 우승하던 그 순간마저 제 감정을 토해내기보단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윤택형의 치료가 계속되고, 온갖 행사를 다니면서도 명훈형은 제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울랄라세션의 일이라면 제일 감정적이면서, 어떻게 자신의 감정에는 저리도 이성적인지..

정말로 바쁜 일정과 녹음을 병행하면서도 지독하게 냉정하게 행하던 명훈형이 감정을 드러낸 것은 다음날, 불후의 명곡을 위한 준비로 한참 바쁘던 녹화 전날의 일이었다. 완벽한 무대를 위해 지속되던 연습에 잔뜩 지친채 잠시 휴식을 취한답시고 다들 연습실에서 쉬고있을때, 명훈형이 담담한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봤다.



"윤택형."
"응?"
"승일이형."
"왜?"
"광선아."
"네?"



우리의 이름을 부른채 한참을 침묵하던 명훈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게.. 이 길이.. 정말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이 맞는거에요?"



그 말에 윤택형도, 승일형도, 나도, 그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불평 한마디, 감정 한조각 내비치지 않은채 꽁꽁 싸매두기만 하던 형이 건넨 그 한마디는 너무나 무거웠다.



"아무것도 바라진 않았는데, 사람들의 그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는, 더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생활이.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입으면서도 아무렇지않게 넘기는 이 생활이 정말 행복해지는 길이에요?"



눈 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울먹이는 명훈형의 모습에 괜스레 나도 울컥해졌다. 조심히 어깨를 토닥이는 승일형의 행동에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명훈형에게 다가간 윤택형이 명훈형을 감싸안았다. 가늘고 작은 몸은 병으로 인해 약해진 윤택형의 품안에도 쉬이 안겼다.



"행복한 길, 맞을꺼야. 그러니 울지마라. 응?"



으,, 흐윽... 흐으으윽- 흐아아아앙-

서럽게 아이마냥 울음을 터뜨리는 명훈형의 모습에 괜히 자책감이 들었다. 슈퍼스타 K3이 끝나고 하던 명훈형의 얘기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그 무엇보다도 울랄라세션을, 임윤택을 좋아하는 명훈형의 그 걱정이.

명훈형의 울음을 기점으로 그 날, 우리는 다들 모여앉아 한참을 울었다.





*





"명훈아."



옆 에서 인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해 쉰 목소리가 조심히 명훈을 불렀다. 아무렇지 않게 옆자리에 앉으며, 상냥하게 손을 감싸오는 온기를 느끼며 명훈의 눈이 윤택을 향했다. 언제나처럼 근사한 미소를 지은 연인이 다정한 눈으로 명훈을 응시했다.



"사람들의 비방, 악플에 상처입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승일이가 있고, 광선이가 있고."
"..."
"그리고 그 무엇보다 네가 있어."
"형."
"그러니, 걱정하지마."



상냥한 음성에 명훈이 힘없이 윤택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병을 앓은 이후 약해진 윤택에게조차 가볍게 느껴질만큼 가벼운 명훈의 몸을 느끼며 윤택이 명훈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이 온기가 있는한,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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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제(承懋帝) 15년 봄


“시끄럽군요.”


무심히 의자에 앉아있던 소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이 천추국(天樞國)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한 피를 이어받아 올해 11살이 된 제 1황자인 청황자(淸皇子) 임윤택이었다. 그 소년의 앞에 앉은 이는 윤택의 외숙(外叔)인 좌찬성 박진문과 그의 아들이자 윤택의 최측근인 승일이었다.


“어쨌든 황가의 피가 섞이진 않았다해도, 그는 황가의 일원이라 인정받았습니다. 그런 이가 7년 만에 들어오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게다가..”
“게다가 담현대군(潭玄大君)이 국무(國巫)의 계승자이기 때문입니까? 좌찬성대감.”


좌찬성인 박진문은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순백의 무복을 입은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었다.


“이거, 신녀(神女)께서 들으신게요.”
“갑작스레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청황자마마.”
“아닙니다, 신녀. 앉으시지요.”


윤택은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의자를 권했다. 그러자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권해진 곳에 앉았다.


“담현대군께서는 결코 황자마마께 해가 될 분은 아니실겁니다. 아니면, 국무의 도움 없이는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하십니까?”
“신녀! 말이 지나치십니다.”
“대감께서도 알아두셔야지요. 황자저하를 걱정시키는 것이 그대의 일입니까?”
“외숙도 절 걱정하여 하시는겁니다, 신녀. 노여움을 거두시구려. 중요한 것은 신녀가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맞는가, 이것이 아니겠소?”


날카롭게 반문하는 그 모습에 윤택이 약간 강한 어조로 신녀를 향해 물었다. 그 말에 신녀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은채 윤택을 바라봤다. 시선조차 피하지 않는 그 강인한 모습에 윤택이 잠시 멈칫하자, 신녀의 눈초리가 곱게 휘어졌다.


“담 현대군께서는 저보다 훨씬 강하고, 좋은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돕거나 하시진 않으실 테지만, 그래도 원망치는 마옵소서. 너무나 착하고, 고운 분이십니다. 저 같은 천녀(賤女)보다 훨씬 좋은 국무가 되실겁니다.”
“신녀의 그 말이, 조금 안심되는구려.”



*



“오늘, 궁으로 입궁하신다하시더니 떨리십니까?”
“안 떨린다면 거짓이겠지. 내, 고작해야 9살 아니더냐. 그러는 광선이 너는 전혀 떨리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저라고 어찌 아니떨리겠습니까? 다만, 저마저 떨면 명훈님을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광 선의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명훈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저보다 1살 더 작은 나이이거늘, 광선은 마치 제 형마냥 굴곤했다. 그런 광선의 행동이 명훈은 늘 기뻤다. 궁궐로 들어간다. 수많은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피한다고 피해질 운명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 뛰어난 명훈은 알고 있었다. 이럴때는 자신이 신을 모시는 무인(巫人)인것이 끔찍스럽게도 싫었다.


“담현대군마마. 궐로 입궐하실 때이시옵니다.”
“알겠네. 가자, 광선아. 이제 궐로 간다면, 난 내 이름보다 국무라는 호칭으로 불리겠지. 싫구나.”
“제가 명훈님의 이름을 불러드리겠습니다.”
“고맙다.”


명훈은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눈을 감았다. 별은 제 운명의 상대가 궐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허나, 신을 모시는 무인에게 운명의 상대라니.


“신의 뜻이란, 참으로 알기 어렵구나.”



*



“궐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담현대군. 앞으로 그대가 이 천추국의 국무의 계승자로서 맡은바 임무를 다해주길 바라네.”
“네, 황제폐하.”
“앞으로 그대는 천신궁(天神宮 : 천추국의 황궁에 위치한 국무와 신녀의 처소. 황족조차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는 성역.)에서 거하도록 명한다.”


윤 택은 새하얀 옷을 입은 채 가만히 눈을 내리깐 소년을 바라봤다. 9살이라 듣긴 했지만, 참으로 어렸다. 저런 어린 아이에게 국무의 계승자라는 묵직한 직책을 수여하다니. 말이 계승자지, 고작해야 1~2년 상간에 저 아이가 국무가 될 것이 뻔했다. 신녀 또한 국무의 계승자라는 칭호를 받은 직후 3년 만에 계승한 터였다. 그것도 이례적으로 늦었다고 불리면서.
약간 창백하다 싶은 얼굴과 반대로 생기가 넘치는 눈동자가 잠시 윤택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랬기에 윤택은 조심스레 황제의 왼쪽을 응시했다. 황제보다 약간은 낮은 자리에 그 여자가 있었다. 새로이 국무가 된, 담현대군의 친모이자, 천추국의 2번째 황자인 진황자(進皇子) 임수언의 어미인 3황비가. 그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제 6살 된 진황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고 보면, 담현대군은 고작해야 3살 때 제 아비를 잃고, 1년 만에 신을 모신다는 이유로 무가(巫家)로 쫓겨나 버린 건가. 게다가 그 후 1년 만에 어미가 사별한 제 아비를 잊고, 황상의 비로 들어가 버리다니. 어찌 보면 안쓰러운 운명이로군.’


하지만, 안쓰러운 것은 안쓰러운 것이고, 윤택으로서는 저자가 택할 길이 걱정스러웠다. 신녀의 말대로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지만, 혹여 제 어미나 이부동생인 진황자의 편을 들어버리면 곤란해질 터였다.


‘확실히, 해두는 쪽이 좋긴 하지만...’


국무에게 함부로 접근하다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안 될 터였다.


‘우선은, 두고 볼까...’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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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잔뜩 쉰 목소리가 울렸다. 언제나 힘없이 쳐진 목소리가 아닌, 강한 힘이 내재된 목소리. 그와 동시에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본능적으로 깨달아버렸다. 계속해서 흐려지는 눈을 닦아내며 단 한순간이라도 더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집중했다.
그런 명훈을 보며 윤택이 힘들게 손을 뻗었다.





"사랑해,, 정말, 널,,, 사랑,,, 해,,,,"





삐-



힘겹게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점점 느려지더니 툭- 떨어져내렸다. 급박하게 쥔 손은 점점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혀, 형.. 형? 윤택형.. 형, 정신 차려봐요.. 형. 형!!!"





급박하게 너스콜을 누르자 달려온 간호사는 당황하며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먹먹하고, 당장이라도 심장이 부서질것마냥 지독히 아팠다.


사랑. 형이 말하던 사랑. 이 괴롭고, 고통스럽고, 아픈 기분이 사랑이려면, 나는 형을 사랑하는 것이리라.



잠시 병실을 비웠던 윤택의 부모님과 승일, 광선이 급박하게 달려왔다. 더이상 그래프를 그리지않는 기계의 차가운 소리에, 윤택의 손을 잡은채 꺽꺽거리며 우는 명훈의 모습에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못했다.


그것이 그들의 이별이었다.






[윤택명훈] 시간을 걷다 01






"으..."





간신히 정신이 든 명훈은 아무도 없자 두려움에 파르르 떨었다.





"승일, 형? 광선아... 다, 어디,, ,어디, 있어...?"





좁고 더러운 단칸방에 널린 옷가지 몇 개와 손때묻은 악기 몇 개.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모습에 명훈의 몸이 두려움으로 덜덜 떨렸다.





"흐으 , 흑.. 혀, 형... 광선아... 으흑,"





달칵-


몸을 잔뜩 웅크린채 울먹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들려오는 명훈의 울음소리에 급박하게 달려온 것은 승일이었다. 비닐봉지는 한곳에 내팽겨쳐둔채 명훈을 끌어안은 승일이 속삭였다.





"명훈아. 명훈아? 형, 여기있어. 광선이도 곧 올꺼야."
"흐, 혀, .. 혀엉... 으흐..."





윤 택의 죽음이후 폐쇠된 공간과 병원, 어둠과 아무도 없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 명훈을 잠시라곤해도 홀로 놔둔 자신이 바보같았다, 한숨쉰 승일이 두려움에 떨다 기절하듯 잠든 명훈을 옆에 고이 뉘었다. 승일의 허벅지를 벤 채 잠이든 명훈을 응시하던 승일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다녀왔, 어?"
"왔냐? 명훈이, 깨서 떨고있더라."
"한명은 남아있을걸.. 잘못했네요."





승일의 말에 낮게 한숨을 내쉰 광선이 식재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정리한 뒤 승일의 옆에 다가왔다.





"어디, 공연갈만한 곳 없어요?"
"글쎄.. 찾아봐야지. 힘드네."





그토록 사랑하고, 원하고, 바란 음악이었지만 그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그것은 윤택의 죽음 이후 더했는데, 그야말로 하루벌어 하루 먹고산다는 말이 가장 어울릴정도였다.





"정말.. 힘들다..."





광선은 승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이번에 광주에서 공연이 생겼어."
"광주요?"
"괜찮은 곳이야. 어때?"
"찬성!"





승일의 말에 명훈이 제일 먼저 웃으며 찬성을 표했다. 자신때문에 승일과 광선을 힘들게 하고싶진 않았고, 어떻게해서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다.





"광선이, 넌?"
"저도 괜찮은것같아요."
"그럼 결정. 오늘 저녁에 가야되니까 준비해."





이것으로 다시 힘을 내자.


승일은 그리 생각하며 웃었다.



힘들어도 우린 함께니까, 괜찮을테니까.






---






빠앙-



귓가를 어지럽히는 시끄러운 소리. 매캐하게 고무가 타는 냄새. 시야를 가득 메우는 불빛.


그것이 명훈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어두운 밤, 광주의 공연을 위해 내려가던 그들을 덮친 거대한 트럭. 그들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채 도로에서 가드레일 밑으로 떨어졌고, 순식간에 모든것을 잃었다.





진짜, 지독히도 억울하고 원통했다.





그것이 마지막 생각이었다.







*



*









그리고,





"명훈아? 왜 그래?"
"뭐, 나쁜 꿈이라도 꾼거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윤택과 승일, 광선을 보고 명훈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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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3. Cafe God Voice





노란 백열등이 깜빡이는 작고 어두운 방. 단촐한 살림살이만 존재하는 이 곳은 빌어먹게도 잘 아는 곳이었다.
지독한 술냄새와 짙은 화장품의 냄새, 그리고 사내와 여자의 살이 얽힐때 나는 그 비릿하고 역겨운 악취.




「하읏- 좋아! 더, 더.. 우읏-」




낡은 문 하나를 두고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성은 지독히도 잘 아는 것이었다.



피식-



싸 늘한 웃음이 나왔다. 몸을 팔아 하룻밤의 위안을 얻는게 무슨 기쁨인지는 모르겠지만, 끔찍했다. 저런 여자의 몸에서 난 나온것이다. 얼굴도 알지못하는 아비란 자도 아마 저 여자의 몸에 이끌렸겠지. 내 아비라는 남자에게 유일하게 감사하는 것은 저 여자- 이윤희의 성인 이씨가 아니라 김씨라는 전혀 다른 성을 주어 김명훈이라는, 여자와는 전혀 다른 이름을 준 것- 그 외에는 없었다.
여 자는 추하고 천박하지만, 그 외모는 발군이다. 어딘가 허무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유혹적인 그 미모는 약과 지독한 화장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지금도 여전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외모를 이용해 타인을 휘두르는것도. 그리고 그 빌어먹을 외모와 분위기는 그대로 나에게 주어졌다. 어미라는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자들 중에는 내게 흥미를 지닌 미친놈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당할만큼 멍청한 어린애는 아니었기에 피해왔지만.
내가 유일하게 저 어미라는 여자에게서 감사하는것인 동시에 증오하는것은 이 외모였다. 사람을 유혹하고, 매료시켜, 내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
문 틈 사이로 약과 쾌락으로 몽롱하게 풀린 여자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당신처럼 살지않아.



그런 나를 알듯 여자는 입가에 유려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그것은 내 뇌리에 끔찍하게 박혀들어왔다. 마치 저주마냥.







---







“어제 전화 받고 오늘 바로 튀어온거냐?”
“뭐, 전혀 아니라곤 안하지.”




승일의 놀려먹는 말에도 명훈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그저 웃을 뿐.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 틀린탓에 가만히 명훈을 바라보던 승일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퀭하고 초췌한 모습.




"또, 악몽이냐?"




아무런 대답없는 명훈의 모습에 승일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가끔 꾸는 그 악몽 이후의 명훈은 굉장이 불안정했다. 괜스레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기에 승일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다행히도 명훈은 그런 승일의 의도에 잘 따라줬다.




“어려보인다고 염색은 죽어도 안하더니 무슨 바람이냐? 게다가 스타일도 정반대.”
“뭐, 지금도 그다지 좋진 않아. 하지만, 귀여운 이미지로 윤택씨에게 낙인찍혀있는데, 그렇게 보여야 되지 않겠어?”




아주 푹 빠졌구만.



절 대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던 녀석이 이렇게 기를 쓰고 제 원래의 스타일마저 버린 채 매달리는 모습이 왠지 조금 낯선 느낌이라, 승일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변하지 않던 칠흑의 슈트가 아닌 밝은 갈색의 슈트, 새카맣던 머리칼은 밤갈색으로 변화시킬 만큼 한사람에게 빠져있다는게 얼마나 위험한지 승일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명훈이 이끄는 조직- 천회는 조폭이었고, 명훈에게 이끌리는 사람의 숫자만큼 적도 많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지나치게 빠져들지마. 너, 위험해진다.”
“나도, 알아.”




버릇처럼 짓고 있던 그 미소를 지은 얼굴은 굉장히 날카로워 승일은 쓰게 웃었다. 검사이던 자신마저 매혹시킬 만큼, 넌 매력적인 놈이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으니 너무 지나치게 포장하려 하지마.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 아는 승일이 걱정스레 명훈을 바라봤다. 그런 승일을 알듯, 명훈이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




형의 배려가 고마워.
나란 놈조차 걱정해주는 그 따스함이 고마워.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서 고마워.







---







"오랜만에 뵙네요, 명훈씨."
“네, 오랜만이네요, 윤택씨.”




언 제나처럼 카페에 들린 윤택은 언제나처럼 햇빛이 따스한 창가에서 책에 푹 빠진 명훈을 발견하곤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요 근래 일주일정도 명훈이 거의 카페에 들리지 않았던 만큼 굉장히 반가웠다. 당연히 윤택은 자신이 왜 그렇게 명훈을 반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 무거워보이던 검은 슈트에 검은 양복이 아닌, 흰 셔츠에 갈색 정장바지, 그리고 멜빵으로 포인트를 준 그 모습이 조금은 더 어려 보여 윤택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은 스타일이 달라지셨네요?”
“안 그래도 조금 어색하네요.”




약간은 어색한 듯 웃는 그 미소가 너무나 예뻐서 윤택은 저도 모르게 순간 멈칫했다. 그 때 한쪽에서 광선과 얘기하며 웃던 승일이 명훈과 윤택쪽으로 다가왔다.




“명훈이는 프렌치바닐라 카푸치노일테고, 윤택씨는 아메리카노죠?”




둘 다 상당한 단골이니만큼 언제나 마시던 것을 물어본 승일이 멀어지자 윤택이 옅게 웃으며 명훈을 응시했다.




“단 걸 좋아하시나봐요. 늘 카푸치노시네요?”
“전 쓴 걸 싫어해서요. 윤택씨야말로 거의 아메리카노던데?”
“저는 단 것을 잘 못먹거든요.”




밝게 웃으며 대화를 주도하는 윤택과 여전히 얕은 어둠이 드리운 미소를 지은채 대화하는 명훈에게 커피를 가져다 준 후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한숨을 쉬면 행복이 달아난대요.”
“한두살먹은 애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거 걱정하냐?”




그 리 말한 승일이 불안한 듯 명훈을 응시했다. 명훈은 강한 녀석이 아니었다. 종종 다들 착각하곤하지만, 굉장히 약하고 섬세해 승일은 늘 명훈이 걱정되었다. 언제나 타인에게 지나치리만치 거리를 두는 녀석이기에 늘 불안했다. 그런 명훈이 이번엔 지나치게 빠져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보스, 불안해보이죠?"
"너도 그리 보이나보지?"




승 일의 물음에 광선은 그저 옅게 웃을뿐이었다. 고등학생때부터 명훈을 봐온 광선이다. 승일도, 광선도 어떤 의미로는 명훈에게 반해있다. 다만 그것이 사랑이 아닐뿐.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데는 사랑외에도 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그리고 김명훈은 사람을 매료시키는데 있어 타고난 면이 있었다.




"임윤택. 저 사람을 만난게 과연 명훈이에게 좋은걸까?"
"그건 모르죠. 다만 보스, 아니... 명훈형에게 상처를 준다면 용서치않아요."




광선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며 승일은 쓰게 웃었다. 명훈은 참 귀찮은 녀석이었다.




"나도, 아마 용서... 못할것 같긴하다."




그리 진지한 승일의 표정을 보던 광선이 씨익 장난스레 웃으며 승일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건 그거고.. 형, 되게 이뻐요."
"야! 대낮부터 미친짓할래?"




이 놈의 자식은 진지한 분위기 망치는덴 뭐가 있다니까!



날카로운 승일의 눈동자에도 광선은 헤헤 웃으며 볼에 입을 맞춘뒤 다다닥- 문 밖으로 달려나가버렸다. 순간 어이없이 당한 승일은 입으로는 툴툴거리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엷은 홍조가 띄워져있었다.





step four. 남매







“너, 뭐야?”





점 심시간에 조금 쉬어볼까 싶어 나온 뒤뜰엔 이미 한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햇볕을 쬐던 그가 인기척에 눈을 떠 물음을 던지는 그 모습이 주변 풍경과 너무나 자연스러워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투명하고 선명한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이 왠지 부끄러웠다.





"저, 전, 1학년 바, 박광선..입니다!"
"킥. 누가 잡아먹는대냐? 다음에 또 보자, 꼬맹아-"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하는 소리에 피식 웃으며 날 놀린 남자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상으로 작은 키와 메마른 체격의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멍하니 서있던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점심시간 종료의 벨이 울릴 때였다.





"예쁘다..."






"광선아, 너 무슨 일 있냐?"





점심시간만 되면 열심히 뒤뜰로 출근하는 내 모습에 친해진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이후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혹시나 알까싶어 물었다.





"키가 작고 하얀 피부에 뭐랄까, 예쁜 남잔데. 우리 학년은 아닌 것 같아. 유혹적? 아니, 매력적? 하여간 몸놀림이 가볍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남잔데 이쁘고, 유혹적이라니. 우리 학교 학생이야?"
"응."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자 옆에서 가만히 듣던 친구가 다가왔다.





"피부가 하얗고, 몸놀림이 가볍고, 유혹적인 키가 작은 남자? 그거 3학년에 김명훈선배 같은데?"
"김... 명훈?"
"아! 나도 알아. 남자면서도 색기? 하여간 묘한 분위기의 선배. 맞지? 그러고 보니까 네가 말하던 사람이랑 그 선배 분위기, 딱 맞아 떨어진긴하네. 근데, 그 선배... 일진이라고 들었는데??"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한 녀석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작게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명훈.


이름조차도 그 사람을 닮은 것 같다. 그리 생각을 하며 밖을 바라봤다.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싶었다.







---







♬So here I am with open arms~♪♩



얼 었던 날씨가 풀리며 조금은 따끈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승일의 카페는 드물게 한가했다. 카페의 유일한 손님이 되어버린 윤택과 명훈은 근 일주일만에 만난탓에 즐겁게 웃으며 한참동안 그다지 쓸모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랬던 윤택과 명훈의 대화가 끊긴 것은 명훈의 품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때문이었다. 이 시간에 자신에게 전화할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누구보다 명훈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응시하자 보이는 것은 하나의 이름이었다.


「김예림」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확 굳어버린 얼굴은 반가움과 기묘한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꽤나 보기 힘든 표정에 윤택이 의아한듯 말을 건넸다.





"전화, 안 받으세요?"
"받아야죠."





윤택의 걱정어린 말에 간신히 답한 명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응. 아아, 오랜만이야. 그래, 돌아온거야?"
'......'
"그건 왜?"
'.....'
"중요한 이야기? 여긴 서울예대 앞에 있는 카페. 갓보이스."
'.......'
"그래. 알았어. 어딘데? 광선이 보낼게."
'.......'
"아아. 그 곳에서 가만히 기다려. 그래, 조금있다가 보자."





전화를 끊은 명훈이 광선쪽을 향했다.





"박광선."
"네?"
"예림이. 인천국제공항에 있다니까, 좀 데리고 와라."
"예림...님이요? 한국에 돌아오신건가요??"
"그래.  부탁하마."





광선 또한 아는 사람인 듯 작게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광선을 보내자마자 깊은 고민에 빠진 명훈의 모습에 윤택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명훈씨?"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각할 일이 생겨서."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다음에 다시 뵐까요?"
"괜찮을까요?"





조 심스레 묻는 명훈의 말에 윤택이 낮게 웃었다. 첫인상과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귀엽고, 생각이상으로 섬세한 남자. 왠지 모르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분위기와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느낌을 지닌 독특한 사람. 왠지 헤어지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저렇게 심각한 분위기를 짓는 명훈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다음에는 좀 더 즐거운 시간이면 좋겠네요."
"저도요."
"그럼 명훈씨.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윤택씨."





윤 택이 웃으며 나가자 명훈이 깊은 한숨을 내쉰 뒤 테이블 위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아무리 피곤해도 제 자신의 공간이 아닌 이상 쉬이 풀어지지 않는 명훈임을 잘 아는 승일이 놀라 명훈에게 다가갔다. 명훈은 그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그 리듬에 승일이 아무런 말없이 명훈의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테이블만 두드리던 명훈이 입을 연 것은 30분이 넘게 지난 후였다.





"궁금한거지?"
"말해줄거냐?"





승일의 그 말에 명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김예림. 올해 27세. 내 아버지 김승조의 딸."
"잠깐. 그 말인 즉슨..."
"내 여동생."





담 담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당황한것은 승일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반의 교제기간동안 단 한번도 명훈의 가족관계에 대해 들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천회 수뇌부의 정보는 거의 없다싶이 했던 이유도 있어서 승일은 명훈이 그저 천회의 전신인 천강파의 보스, 김승조의 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외동이라고 생각해 왔던 탓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 처음듣는데?"
"단 한번도 말한적 없으니까. 말해두지만 여동생만이 아니라 남동생도 하나있어."





그 말에 황망히 명훈을 바라보던 승일이 정신을 차린 것은 딸랑이는 방울소리였다.





"다녀왔습니다."
"오빠!"





조심스러운 광선의 인사 바로뒤에 들리는 밝고 활달한 여성의 목소리. 조막만한 얼굴에 살짝 웨이브진 갈색 머리칼을 여자는 길을 가다가 한번쯤은 돌아볼법한 상당한 미인이었다.





"아아, 오랫만이야. 6개월 만이지?"
"응!"
"여기 승일씨는 카페 오너. 인사는?"
"안녕하세요! 명훈오빠 동생인 김예림이라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있게 얘기하는 예림의 모습에 쓴웃음 지은 명훈이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해. 주문은?"
"저는 화이트 핫초코."





명 훈의 그 말이 자리를 비켜줬음 한다는 은근한 의사표시임을 아는 승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쪽으로 사라지자 광선 또한 주방앞의 카운터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명훈이 예림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방금전까지의 밝고 활동적인 미소를 지운채 진지하게 명훈을 바라봤다.





"이렇게 급하게 귀국한 이유가 뭐야? 너 1년 정도 예상하고 갔잖아? 대윤이도 그 정도는 이해해줬고."
"형태때문에."
"형태? 형태가 왜?"
"형태, 경찰 된거는 알지? 이번에 강력계로 간대. 형태, 오빠 엄청 싫어, 아니, 혐오하는 수준인거. 알잖아?"





예림의 말에 명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림의 쌍둥이 동생이자 삼남매 중 막내인 형태는 명훈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예림이 명훈을 오빠라고 따르며 좋아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오로지 명훈에 대한 증오로 경찰이 될만큼.





"형태, 오빠도 알다싶이 천회의 전신인 천강파 시절부터 알고 있어. 아버지가 숨기기는 했다지만, 사실 그런거.. 한 집에 있으면서 모를리 없잖아?"
"그렇지."
"오빠가 천강파 장악하고 지금의 천회로 바꾸면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긴했다지만, 지금 남은 자료만으로도 천회, 어려워질 수도 있어. 난, 오빠가 걱정스러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예림에게 명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현재 연좌제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알게모르게 남은 은근한 차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될만큼 분노가 큰 형태의 행동이 걱정되지 않을리 없었다. 하지만.





"예림아. 천회, 그리 녹록한 조직이 아니라는 거, 알아둬라. 이 내가 그리 못난 조직, 만들것 같아?"
"후훗. 그건 그렇네."
"자, 여기 화이트핫초코 나왔습니다. 그리고 명훈이 네가 먹을 것도 여기."
"고마워. 자, 먹고 나가자. 대윤인?"





승일이 가져다 준 핫초코와 커피를 마시며 명훈이 밝은 목소리로 화재를 전환시켰다. 더이상 신경쓰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가 깃든 목소리였다. 예림 또한 그런 오빠의 화재전환에 환히 웃으며, 그러나 약간은 당황한채 얼굴을 붉혔다.





"3시 정각에 이 곳으로 오기로 했어."
"사이가 좋기도하지."
"놀리기 없기다-!"
"안놀려. 그럼 15분 남은건가?"





잠시 시계를 보던 명훈이 핫초코를 홀짝이는 예림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품 속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원권 수표를 몇장 꺼냈다.





"뭐야?"
"용돈. 너 남자친구도 만나고하려면 부족할거아냐? 게다가 6개월만의 귀국이면 돈도 별로 안들고 있을꺼고."
"그건,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예림의 모습에 명훈이 낮게 웃으며 수표를 예림쪽으로 밀었다.





"받아둬. 아, 그분은?"
"응? 아, 엄마?? 잘계셔. 뭐, 엄마야 언제나처럼 우아하시지. 조금 몸이 안좋긴한데, 그거야 워낙에 몸이 약한분이시니까. 엄마도 조심해. 울 엄마, 오빠 별로 달갑잖아 하시는거, 오빠가 더 잘알잖아."
"아아-"





예림의 말에 어딘가 미묘하게 웃은 명훈이 빈 잔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명훈의 모습에 돈을 챙긴 예림 또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대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된 탓이었다.





"나가자. 형, 나 가볼께요."
"아아- 잘가. 잘가세요, 예림씨."
"네."
"광선이도 잘가고."
"조금뒤에 뵈요."





배웅하는 승일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온 명훈과 광선, 예림의 눈에 약간은 마른 체국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바쁘게 달려오는 모습에 예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랫만이다, 대윤아."
"안녕하세요, 명훈형. 광선형. 오랫만이야, 예림아."





명훈의 인사에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은 대윤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약간은 쑥스러운 듯 웃는 대윤의 모습에 밝은 모습이 아닌, 새침떼기 아가씨마냥 웃은 예림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해줄거지?"
"네, 공주님."





그런 예림의 모습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정중하게 잡은 대윤의 모습이 맘에 든 듯, 예림이 명훈과 광선을 바라봤다.





"가볼께요, 오빠. 광선오빠도 고마워요."
"가보겠습니다."
"날이 풀렸어도 추우니까, 늦게까지 돌아다니진 마라."





왠지 충고하는 자신이 늙은이같은 느낌에 명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배웅하자 예림과 대윤또한 환한 미소를 지은채 멀어져갔다. 서로 팔짱을 낀 채 밝게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이 안보일때쯤, 명훈의 표정이 굳었다.





"박광선."
"네?"
"정보, 차단해라. 김형태가 경찰로서 제대로 우릴 잡아보려는 모양인데... 그리 쉽지 않다는걸 알아야지. 그리고 미국에서 부인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잘 살펴. 그분도 날 달갑지 않아하시는건 알잖아?"





서늘한 어조에 그저 고개를 숙인 광선을 응시하던 명훈이 입가에 얇은 호선을 그렸다.





"천회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거. 알아야지. 김형태."






---






"이번에 우리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1반에 부임한 김형태경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약간은 날카롭게 생긴 미형의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강력계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의 환대를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만은 싸늘하게 빛났다.





'두고봐. 천회, 무너뜨려주지.'






step five. 무적파



“보스. 무적파에 대해서 어떻게 할까요?”
“흐음... 우선은 놔둬.”
“네?”


광선은 자신도 모르게 명훈에게 되물었다. 평상시라면 그런 광선에게 핀잔을 줄 명훈은 그저 나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냥 놔둬도 되는겁니까?”
“아아- 괜한 부스럼을 만들필욘없지. 이건 빚으로 남겨두는게 나아. 무적파쪽에서는 조금 속이탈지도 모르겠는걸. 큭큭.”
“아...”
“적당히, 항의문정도나 보내. 다음에는 이런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네”


광선이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명훈이 눈을 빛냈다. 어쨌든, 상당한 힘과 무력을 지닌 무적파의 보스에게 이런식의 빚을 만들어 둔다면, 이득을 보는 것은 천회였다.


“이거ㅡ, 감사히 여겨야겠는걸. 아하하핫!”



---



방 은 어두웠지만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치된 고급 가구들과 장식품. 그 곳에 위치한 고급 마호가니 책상을 마주보고 앉은 중년의 남자와 남자의 앞에서 공손하게 보고중인 사내가 있었다. 암갈색 정장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멋지게 빗어 내린 중년인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져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임수혁」이라는 상아로 만든 고급 명패가 있었다.


“독사파놈들이 당했다고?”
“네.”
“어차피 일회용이다. 상관없어.”
“천회놈들이 저희가 뒤에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습니다. 여기, 그들의 항의문입니다.”


그 말에 무심히 답하던 남자, 임수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흰색의 봉투를 받아들었다. 빠른 속도로 편지를 꺼내들어 훑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제일 빚을 만들고 싶지 않는 상대에게 빚을 만들어버렸군. 곤란해, 곤란해. 김명훈, 그 영악한 새끼가 그냥 넘길 리는 없을 테니.”
“천회를 한번 엮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새끼들이 켕길만한 짓거리 하겠냐? 그것도 김명훈 그 새끼가? 뭘로? 폭력? 매매?”
“드러그(drug-마약의 속어)라던가.”


남자의 말에 그는 피식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애새끼주제에 얼마나 철저한지 모르는거냐?”
“진실이든, 아니든, 그냥 엮어버리면 수사가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는 약간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생각은 가상하다만 그것은 김명훈을 너무 손쉽게 본 얘기였다.


“쯔쯧. 너도 아직 어리군. 윤민이 네가 앞으로 이 조직을 이어받을 거라면 알아둬라. 확실하고 정확한 증거 없이 천회, 아니, 김명훈 그 자식을 철창에 집어넣으려면 도리어 네가 당한다는걸.”
“네?”


임수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윤민에게 의자에 앉도록 지시한 뒤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윤민은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 놈은 , 이윤화, 그 년을 너무 많이 닮았다.”
“이윤화...?”
“적 어도 우리나라에 나이 꽤나 있고, 이름 꽤나 알려진 놈 중에서 그 년 치맛자락에 휘감겨보지 않은 놈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계집이지. 정·재계는 물론이요, 연예계, 학계 등. 분야를 불문하고 그 계집 모르는 사내놈이 있을까 싶을 만큼.”
“그래봤자, 고작 창부계집 아닙니까?”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 윤민에게 임수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 래. 그냥 창부계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윤화, 그 갈보년이 얼마나 교활하고 잔악한 계집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좌지우지 하던 잔망스러운 년이, 그 외모만은 발군이라 사람을 끌어들이지. 팜프파탈이라하지? 그 계집이 그러했다. 사내들이 제 살 파먹는걸 알면서도 그 계집을 끊지를 못해 찾게 되는 요부. 그 계집이 나이를 먹고, 애를 낳은 뒤, 약에 취해도 그 미모가 시들기는커녕, 퇴폐적이고 허망해서 사내들이 그 년을 못 안아서 난리였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리 살았지. 완전히 약에 취해 죽기 직전까지도.”
“...”
“김명훈. 그 애새끼가, 그 계집년을 쏙 빼어 닮았지. 사람 유혹하는 모양새하며, 뒤에서 정보가지고 사람들 조종하는 꼴하며. 그 계집년이 남긴 정보, 다 그 놈이 가지고 있어. 지금 이윤화, 그 년 품에 안은 놈치고 김명훈 그 자식에게 세게 나갈 수 있을만한 사람, 높으신 분들 중에는 아무도 없을 꺼다. 우리가 그 놈 치려다가 되려 당해버리고 말테지.”


임수혁은 잠시 눈을 감고 이윤화를 생각했다. 화사한 미모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던 색기. 그저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남자를 유혹하던 그 천부적인 재능. 나름대로 냉정하다 생각했던 자신마저 순간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넋을 잃을 만큼 놀랐었다. 그리고 그 재능을 천회의 그 애송이 놈도 지니고 있었다. 슬쩍 웃고,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런 재능이.


“그 놈이 계집년이었으면, 더 힘들었겠지. 그런 계집, 이윤화, 그 하나로도 족하니까.”


제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민의 모습에도 임수혁의 얼굴은 좋아지질 않았다. 말은 그리 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김명훈은 계집은 아니었지만, 제 아비와 제 어미의 재능을 제대로 이어받은 놈이었다. 제 어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을 매료시키고, 제 아비처럼 다수의 사람들을 조종하는 카리스마. 그 모든 것을 갖춘 녀석.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해야 4년 만에 천회를 이정도로 키워내질 못했을 터였다.
어떤 의미로는 임윤화나 제 아비인 김승조 이상의 위험인물. 그런 녀석에게 제 아들이자 no.2인 윤민이 맞설 수 있을지,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었다.


“그 새끼, 약점을 찾아봐. 천회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면 좋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뭐라도 좋아."
“네.”



---



“맛있어!”


아이스크림을 한입 크게 입에 넣은 명훈이 한없이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헤실거렸다.


“좋아요?”
“네!”


그 야말로 어린애마냥 웃는 모습에 윤택의 얼굴 또한 다정하게 변했다. 윤택 자신은 저렇게 단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명훈이 저리 웃는 모습을 보니 제 기분마저 좋아진 탓이었다. 꽤나 큰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던 윤택이 갑자기 생각난듯 입을 열었다.


“아! 명훈씨. 혹시, 놀이공원 좋아해요?”
“?”
“우연히 티켓이 생겼는데, 같이 가실래요?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어때요?”
“저는 영광이죠.”


명훈의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윤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이제 수업이라 이만 일어날께요. 그럼 일요일에 뵈요.”
“네!”


윤택이 사라지자 명훈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승일과 광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갈꺼지?”
“네.”


광선의 대답에 안심한 듯 한 명훈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부끄러운 듯 웃었다. 설마하니 윤택이 먼저 약속을 제안할 줄은 몰랐던 터라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렸다.


“아아. 기대된다.”










* 명훈이 엄마이름 이윤희->이윤화로 변경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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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zero. 첫 만남








"으, 으악!"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넘어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느 긋하니 그런 생각으로 보고 있었지만 넘어진 채 일어서지 못하는 그 모습이었다. 혹여 크게 다친게 아닌가 걱정스러워져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내미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남자. 내 걱정스런 질문에 어색한 듯 웃으며 답하는 그는 카페에서 종종 보이곤 하는 남자였다. 검은 와이셔츠에 검은색의 양복, 언제나 안경을 쓴 채 책을 읽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인.






"고맙습니다, 제 이름은 김명훈입니다."

"네. 저는 임윤택입니다."






꽤나 무서워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눈꼬리를 휘며 웃는 모습이 생각보다 귀여웠다.













step one 인연








"윤택씨는 그럼 대학 조교수로군요. 대단하시네요."

"별말을요."






처 음 도와준 이후 종종 얘기하게 된 명훈은 생각보다 귀엽고, 생각보다 애교가 많았다. 굳게 다문 표정은 냉담한데도 웃는 모습은 귀여웠고, 그의 인상을 사납게 만드는 수염이 작은 키라던가 귀염성 있는 외모를 조금이라도 더 남자답게 보이려고 기르기 시작했다며 쑥스럽게 웃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가만히 그가 수염이 없는 모습을 생각하면 공감이 가지 않는것도 아니었다. 수염이 없는 명훈의 모습을 시뮬레이션해본 결과 정말로 어려보이는 동안임에 틀림없었으니까. 지금도 가만히 살펴보면 어려보이는데, 수염이 없다면 진짜 학생으로 오인할테니까.






"윤택씨는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 그래요?"






자 신을 보며 웃는 명훈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윤택이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낯선 단어였다. 어렸을적부터 워낙에 어른스러웠고, 대학에서도 사람들을 챙기며 리드하는 스타일인탓에 깊은 관계를 맺은적이 거의 없었다. 그 탓에 보통 듣는 소리는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엄격하다, 무섭다, 어른스럽다, 이런 얘기들이었지 재미있다는 얘기는 거의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명훈씨도 굉장히 귀여운걸요."






자신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 그 모습에 충동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린 윤택은 아차 싶은 마음에 명훈을 바라봤지만 생각보다 나빠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수염을 길렀는데도 영 그런 소릴 많이 듣네요. 이상하네..."

"외모 때문만은 아니에요."






고개를 갸우뚱 젖히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명훈에게 말을 걸어버린 윤택. 그 말에 명훈이 눈을 반짝이며 윤택을 응시했다.



참, 이리 귀여운 행동을 하면서 자신이 모른다니.



윤택은 헛웃음을 지으며 명훈을 바라봤다.






"명훈씨, 행동이 굉장히 귀여운거 알아요?"

"그래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네요. 행동을 어찌할 수도 없고..."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명훈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윤택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졌던 명훈 또한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윤택씨, 왜..."

"명훈님."






명훈의 물음이 채 나오기도 전 말을 건네는 것은 검은 양복을 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명훈의 보디가드인 박광선, 그였다.






"광선아."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이런, 윤택씨, 죄송합니다."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사과하는 명훈의 모습에 윤택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웃었다. 그 모습에 명훈 또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썬팅된 고급 자동차에 올라섰다.






"그럼 다음에 뵐께요."

"다음에뵈요, 명훈씨."






윤택은 점점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약간은 복잡하게 응시했다. 어째서인지, 굉장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 * *








"흐으-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다니, 무슨 일이야?"






방금 전까지의 생글생글 환하게 웃던 귀여운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마자 폭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이 숙인 명훈이 느른하게 물었다.

순진해보이던 눈매는 살짝 내리깔리고, 환한 미소를 머금었던 입가에 느긋하고 여유로운 비웃음이 걸린 것만으로도 명훈은 귀여운 남자는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색향을 품고 있었다.






"전환이 빠르시네요, 보스."

"뭐, 당연한거지. 자- 용건이나 말해봐."






느긋한 미소를 짓는 명훈의 모습에 광선은 절래절래 고개를 저으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그는 해야할 일을 잊지 않았다.






"독사파놈들이 움직였습니다."

"우리한테 덤비기엔 말도 안되는 놈들이?"

"뒤에 무적파. 그 놈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명훈이 이끄는 천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무적파와 연을 가졌다고 덤비는 모양이었지만, 그런 조잡한 놈들에게 당할 천회가 아님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빽이 있다 그거로군. 철저히 무너뜨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주라고. 알겠어?"






눈을 반짝이면서 명하는 명훈의 모습에 광선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사안이 끝나자 명훈의 열굴에 요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나한테 관심 좀 가졌을까나?"

"너무 매달리시는 것 아닙니까?"

"웃기지마. 네 놈이 박승일에게 얼마나 울고불고 매달렸는지, 난 다 알고 있다는거 모르냐?"

"보, 보스!!!"






급격하게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는 광선을 보며 명훈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임윤택. 처음 보는 순간부터 자신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남자.






"난- 한번 선택한 사냥감을 놓치진 않는다구. 기대해, 임윤택."






명훈의 눈이 요염하게 빛나며 밖을 응시했다.



김명훈(30세. 남)의 임윤택(34세. 남) 유혹하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 주인공 프로필


임윤택(34세. 남)

서울예대 연극영화과 조교수. 무려 32살에 조교수가 될만큼 유능하고 머리도 좋은 남자. 명훈의 눈에 우연하게 들어버린탓에 명훈이 현재 유혹중. 어느새 조금씩 넘어가고있음.



김명훈(30세. 남)

대 한민국 뒷세계 최대 조직인 천회의 보스. 카리스마성도 있고, 능력도 좋다. 매력적인 외모에 굉장히 색기 넘치는 보스. 임윤택에게 반해 윤택앞에서는 내숭 100단. 순진한 척, 귀여운 척, 등등.. 윤택앞에서는 거의 이중인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있다.



박승일(33세. 남)

서울예대 앞 작은 카페 겸 바, God Voice의 오너. 원래는 잘나가던 검사. 하지만, 재수없게도 박광선의 눈에 들어 연인이 된 후 현재는 카페 운영중. 천회의 변호사 역활도 같이 하고있다.



박광선(28세. 남)

천회의 행동대장이자 보스인 명훈의 오른팔. 윤택은 경호원이라고 알고있다. 검사인 박승일이게 반해 오랜기간 쫓아다닌끝에 결국 연인으로서 승낙을 받아낸 집념의 사나이.






step two. Cafe owner 박승일






과연 언제까지 버틸까?



승 일은 제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전공서적을 뒤적이는 남자, 임윤택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윤택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가정은 전혀 없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김명훈이 움직여서 실패한 경우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탓이었다. 고작해야 20대 초반의 나이로 보스가 되어서는 5년 만에 대한민국의 뒷세계를 점령할 만큼 명훈은 영리하고 또 잔혹했다. 게다가 사람을 매혹시키는 카리스마마저 갖춘 존재. 만약 명훈이 뒷세계가 아니라 앞쪽으로 나왔어도 성공했을 거라, 승일은 그리 생각했다. 그런 인물이 혼신을 다해 유혹하고 있는데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네? 아뇨. 별거 아닙니다.”






윤택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넘긴 승일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박광선, 이 자식은 어째 연락이 없는 거람.






♬swing~ swing~ swing my baby♩♪




"여보세요?"

「형! 저 조금 늦어질 것 같은데, 어쩌죠?」

“또 왜?!”






고작해야 전화해서 하는 소리가 안부도 아니라 제 용건이란 말이지? 싸늘해진 승일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 광선이 전화너머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 일이 생겨서.. 혀엉~ 빨리 갈게요.」

“9시. 이 이후엔 집에 올 생각마라.”

「에? 형, 형!!!」






급격하게 당황하며 소리지르는 광선의 목소리에도 승일은 냉정하게 통화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느긋하게 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런 승일을 보며 윤택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시네요.”

“네?”

“왠지, 조금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라.”






윤 택의 말에 승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체 차가운 인상인데다가 검사로 일하면서 조금 더 그런 분위기가 붙은 터라 아직 채 떨쳐내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2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검찰청에서 평검사치곤 꽤나 대우받던 자신이 아니던가. 자신에게 울며불며 매달리며 대쉬하던 광선이 아니었으면 아마 아직도 검사로서 있을 터였다.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전, 첫인상에 영 재주가 없는가봐요. 승일씨도 그렇고, 명훈씨도 그렇고.”

“네?”






윤택의 입에서 나온 명훈이라는 이름에 승일은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이 사람이 보는 김명훈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랬기에 승일은 설거지를 멈추고 커피 두 잔을 가져가 윤택의 앞에 앉았다.






“윤택씨가 보기에 명훈이는 어떤 사람이죠?”

“꽤나 친밀하시네요?”

“워낙에 단골이니까요. 자주 찾아오고."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납득하는 윤택의 모습을 보며 승일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거 아무래도 이 임윤택이라는 남자가 김명훈의 손아귀에 떨어질 날은 멀지 않아 보였다.






“명훈씨는... 귀엽죠. 순진하고, 착실하고, 상냥하고.”

“컥, 켈록- 켈록-”

“괜찮으세요?!!”

“아.....네, 윤택씨가 보기에 명훈이는.... 그, 그렇군요.;;”






윤택의 말에 순간 커피를 뿜어낼 뻔한 승일이었지만 간신히 참아내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례가 걸려 콜록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세 상에. 무려 천회의 보스. 그 오만하고, 도도하고, 매력적이며, 잔인한데다, 제멋대로인 남자에게 귀엽다? 순진하다?? 착실하고 상냥하다???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명훈의 본성을 아는 승일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얘기였다.






'광선이, 그 녀석은 귀여운 거였어. 그래... 울며 매달리는 쪽이 낫지.’





「“혀엉- 나 형이 저~~엉말 좋아요.”

“얌마! 너 내 직업이 검산거 모르겠냐? 세상에 내 검사에게 매달리는 조폭새낀 처음 본다. 그것도 너 천회의 행동대장이라면서?”

“그게 뭐가 어때서여.”

“이 녀석, 막무가낼세. 얌마, 검사인 내가 조폭새끼인 네 놈이랑 어울릴 것 같다 생각하는 거냐?”

“나랑 사겨줘요. 안 그럼- 나- 안 나갈-거에요.”

“당장 나가!”

“싫어요- 흐어어엉-!!”」







완전히 술에 절은채 집에 찾아와서는 펑펑 울면서 고백하던 광선을 생각해낸 승일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광선이가 조금 늦게 오더라도 용서해야겠다. 암, 김명훈에 비하자면 광선이 놈은 순진하고 착한 강아지새끼나 마찬가지지. 그럼 그럼.




승일은 그리 생각하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짓는 입 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승일을 윤택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So here I am with open arms~♪♩



『박승일』




옆에서 승일이라는 이름에 눈을 반짝이며 휴대폰만 응시하는 광선을 무시한 채 잠시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응시하던 명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웬일이야, 승일형?"

「아주 재미난 소릴 들어서.」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차마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킥킥거리는 승일의 목소리에 명훈의 눈동자가 의문을 띄었다.






「세상에. 너에게 귀엽고, 순진하고, 착실하고, 상냥하다더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아 무리 생각해봐도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평가에 느른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던 명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매력적이다, 유혹적이다, 퇴폐적이다, 제멋대로 성격 더러운 녀석이다. 라는 평가야 꽤나 들었고, 그 평가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명훈이었지만 지금 승일이 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금시초문.



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할 만큼 대담한 놈은 내가 다 반쯤 죽여 놨었는데?



그런 고민을 하는 명훈을 알 듯 전화 건너편 승일의 목소리는 밝았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

"당연하잖아."

「임윤택. 우리 보스님, 임윤택 그 사람에겐 이미지메이킹 성공했네. 이거,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승일의 입에서 나온 단 하나의 이름에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러보면 윤택 앞에서야 그런 모습을 위장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라주는 모습이라니. 생각보다 순진한 건가?






「김명훈, 임윤택에게 잘해야겠더라. 아, 그리고 광선이에게 오늘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전해줘.」

"아아-"






그 와 동시에 끊어진 전화기에 간절히 전화를 바라보던 광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철저히 승일에게 잡혀 사는 광선이 심기를 거슬러버린 승일에게 전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명훈이 전화를 바꿔주는 것을 기대한 모양이지만, 불행히도 명훈은 그리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이미지메이킹이 잘된 건가? 너무 그런 이미지면 곤란한데 말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고민에 빠진 명훈이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모든 일이 언제나 제 뜻대로 풀린 탓에 세상에 어려운 것 없다 자신하던 명훈에게 정말 임윤택이라는 남자는 모든 면에서 제 예상을 뛰어넘는 상대였다.






"뭐,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말야. 아, 박광선. 승일형이 너 조금 늦게 들어와도 된다더라."

"진짜요?!"






명훈의 한마디에 바로 밝아지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늘상 승일이 말하는 귀여운 박광선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뒤에서 바쁘게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는 환각이라니.






"어찌된 게 넌 그리 승일형한테 잡혀 사냐?"

"상관없잖아요. 내가 좋아해서 매달렸는데. 제가 문제가 아니라, 제 눈에는 보스도 그럴 것 같거든요."

"웃기는 소리."






뚱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는 광선을 보며 명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런 애새끼 같은 놈이 조직 내에서는 얼음 같다느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니 해대며 두려워하는 꼴이 영 우스웠다.






'아무래도 인간관계를 재정립해야할 필요성이 있어. 저런 싸이코같은 놈이 어딜 봐서... 아이고.'






광선이나 승일이 알았다면 분명 반발했을 생각을 하는 명훈은 결코 그 범주에 자신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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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묘한 17금 주의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철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제 품속에 있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시퍼런 칼날의 빛이 시리도록 눈을 파고들었다. 지독하게 비를 맞은 탓에 정신을 잃은 명훈의 몸이 뜨거웠다.






“하아.. 하아....”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히 볼에 손을 가져갔다. 성인임에도 보드라운 살결이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렸다.



내가 널 어찌 버리겠니. 이건, 버리는 게 아니다. 그저 내 목숨보다 널 더 소중히 여긴 것이야. 그러니 명훈아. 너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라. 내게 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윤택은 조심스레 명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안녕, 명훈아. 내 하나뿐인 정인아.











반란 외전 Side - Sad











따스한 봄의 햇살.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간신히 정신이 든 명훈이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토록 그립고 그립던 집이었다.






“정신이 드니, 명훈아?”

“서방님!! 제가 보이십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소중한 어머니와 제 지어미였다. 자신을 안고 눈물을 터뜨리는 부인과 계속해서 머리와 얼굴만 쓰다듬는 제 어미를 보고 있음에도 어딘가 마치 꿈같다. 그리 생각했다.


늦둥이인데다가 워낙에 몸이 약했던 터라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랐더랬다. 언제나 몸이 약한 막내아들을 귀이 여기던 어머니였지만, 어째서 저리 놀라고 기뻐하는지, 그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깨어나 다행이로구나.”

“아.. 버지..”






형편없이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명훈이 더 당황했다. 당최 어찌된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여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크게 앓았느니라. 하긴, 그럴 만도하지. 반란군에게 잡혀서 고생한데다가 체력도 약한 네가 산에 끌려가질 않나, 비를 맞아서 사경에 헤매는 상태인 널 인질로 삼을 만큼 지독한 반란분자였더구나.”

“관군이 널 구해 와서도 일주일이 넘게 사경을 헤맸단다. 정말,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깨어난 게야.”






아버지와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명훈은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은 윤택과 함께 산길을 헤매다가 비를 만나 동굴로 들어간 것 까지였다. 그런데 반란군에게 인질로 잡혔다?






“그 임윤택이라는 자. 지독하더구나. 네 어릴 적의 동무이면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쯧쯧."






그제서야 윤택에게 생각이 미친 명훈이 급히 몸을 일으키려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온몸에 퍼지는 지독한 고통.






“아직 몸이 낫지 않았는데 조심해야지!! 좀 더 누워있으렴.”

“반.. 란군은... 어찌되었습니까?”






힘겨운 명훈의 물음에 아버지인 김대감의 표정에서 안쓰러움과 분노가 스쳐지나갔다.






“주 모자인 홍경래와 우군칙, 그리고 널 납치한 임윤택은 효수(梟首)되었느니라. 살아있었다면 능지처참 후 그리되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죽어서 한성에 들어온 터라 그저 효수의 형벌만 받았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대역 죄인을 그리 쉬이 죽이다니.”






그 말에 명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날 버리고 갔으면 살 수 있었을 것을 왜.. 그런 것이오. 나 같은 놈 죽게 내버려두질 않고 왜....






“아직 몸이 채 낫질 않았는데 너무 심란한 얘기만 했구나. 쉬거라. 부인, 아가. 나가자꾸나.”

“네, 대감. 우리 아들, 좀 쉬거라.”

“서방님, 잠시 후 오겠습니다.”






그들이 나가자 명훈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저를 보며 환히 웃던 윤택이 생각나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저 제 몸을 탐하고, 제 신뢰를 져버렸고, 주상께 반역하는 대죄를 저지른 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그리웠다. 절 제 품에 묶어 날아가지 못하도록 길들이고선 사라져버린 자.






“내게 어쩌란 것이오, 대체 어쩌라고...”






가려진 명훈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간 신히 깨어난 명훈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지 벌써 한 달이 흘렀건만 명훈은 집밖으로 나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방에서 서책을 읽고 가끔 마당에 나와 넋을 잃은 듯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볼 뿐. 그런 명훈의 모습에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명훈은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이리 의욕이 없이 행동한 적은 없었기에 다들 당황했으나 워낙에 고생을 한터라 그런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님!!”

“현택아.”






그 런 명훈을 웃게 만드는 유일한 이는 이제 4살 난 명훈의 아들, 현택이었다. 제게 도도도 달려오는 어린 아이는 제법 무거워 가는 체격의 명훈에게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그는 아이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웠다. 아이의 이 온기가 이미 사라져버린 이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현택아! 너 아버님이 힘드실 터이니 그리 달라붙지 말라,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아버님이 좋은걸요.”






뚱한 표정으로 입을 내미는 모습이, 당돌한 그 어조가, 아이의 모든 것이 그리운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그가 어릴 적 저러했다.



아이는 제 핏줄임에도 놀라울 만큼 그와 닮아있었다.






“이 못난 아비가 좋으냐?”

“당연하지요! 전 세상에서 아버님이 제~일로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 이상으로 소중한 이가 없음이다. 난 네가 제일 좋다, 명훈아.」






제일 좋다하고 어찌 그리 떠나신거요?




아마 제 마음 속에 다시는 누군가가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평생토록 그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죽음이 편타 생각할 만큼 괴로워하면서 지내겠지.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주지 못한 이 마음, 그대를 대신해 이 아이에게만 온전히 쏟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떠난 그대의 잘못이니 뭐라 하지 마시오.


명훈은 힘주어 아이를 껴안았다. 그것은 바른 것도, 그 무엇도 아닐 테지만, 내게 남은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나도, 택이, 네가 제일 좋다.”


  

  

===



“어쩌면, 네가 가진 것을 다 버려야할지도 몰라.”






내가 가진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아비의 권세였고, 나는 그저 그 권세의 혜택을 받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지독하게 몸이 약해 어릴 적부터 날 사랑해주던 부모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이 못난 놈과 혼인한 부인과 이제 4살이 되었을 어린 아들을 생각하면 괴로웠지만, 사내의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미친 게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생각을 할까? 내 자신의 잔혹성이 무섭고, 이 욕망이 두렵다.





하지만, 사내의 온기를 놓치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윤택명훈] 반란(叛亂) 外傳 Side - Happy











바 로 지척까지 쫓아온 군관을 따돌리는 것은 엄청난 인내와 체력싸움이었다. 청나라의 국경만 넘어간다면 따라오지 못할 터. 게다가 열이 펄펄 끓는 명훈이가 오랜 시간 버틸 리가 만무했다. 몇 번이나 포기할까 생각도 했으나 그때마다 제 손을 부여잡는 명훈의 온기가 없었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 질긴 추적을 뿌리치고 간신히 청의 국경을 넘었을 때 명훈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한달이 넘게 의원에서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눈을 뜬 명훈이는 완전히 초췌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싹 메마른 입술로 간신히 달싹거리며 하는 말은 윤택의 눈물을 뽑아내기에 충분했다.






“왜, 그런, 표정인거야, 성은...”

“원망하지.. 않는 거냐?”

“내가, 선택, 했으니까.”






명훈은 그런 이였다. 제 선택에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런 단호한 녀석.






“행복하자, 명훈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우릴 살려준 다른 사람들 몫만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명훈의 모습을 보며 윤택은 명훈을 꽉 껴안았다. 내, 너의 이 온기를 놓치지 않을거다.








* * *








1820년 청나라 심양






"아니, 너무하지 않소!! 이것이 아무리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라 하나 어찌 이리 비싸단 말이오."

"싫으면 마시오. 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워낙에 자네가 단골이라 남겨둔 것인데 어찌 그런 소린가?"






상인의 말에 조선옷을 입은 사내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상당량의 가경통보를 건네고 받은 책은 그리 훌륭하거나 좋은 책은 아니었지만, 보고 기뻐할 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슬 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의 모습에 저를 걱정할 정인의 생각에 조금 걸음이 조급해졌다. 가볍게 식재료 몇 가지를 함께 산 그가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꽤나 한적한 시골마을 한켠의 작은 집이었다. 한 쪽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그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다녀왔다, 명훈아"

"아, 어서오시오, 형."






환히 웃으며 마중하는 명훈의 모습에 윤택은 환히 웃으며 명훈에게 다가갔다.






"서책이랑 가벼운 찬거리들을 사왔다."

"내 하면 된 다해도 그리 쓸데없이 부지런도하네."






타 박하듯 말하는 명훈이지만 실제 속내가 그렇지 않음을 아는 윤택은 식재료를 부엌에 넣어 둔 후 서책을 한쪽에 놔두고선 여전히 빨래에 신경 쓰는 명훈의 뒤로 다가가 그 작은 몸을 쏙 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내음이 윤택의 기분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남새스레 왜 그래?"

"네가 좋아서 그런다."






퉁명스런 명훈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윤택을 흘겨보는 명훈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너무도 귀여워, 윤택은 그저 웃었다.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1각(1각=15분정도)후면 벌써 해시(21시~23시)다. 어두워졌으니, 이제 방으로 들어가자."






윤택의 그 은근한 요구에 명훈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진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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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품속에서 흐트러진 채 깊은 잠에 빠진 명훈의 모습에 윤택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품에 안았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제 흔적을 몸에 남긴 채 잠든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윤택은 고개를 숙여 명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가져갔다.







"사랑한다, 명훈아."






잠든 명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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