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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제(承懋帝) 15년 봄


“시끄럽군요.”


무심히 의자에 앉아있던 소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이 천추국(天樞國)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위대한 피를 이어받아 올해 11살이 된 제 1황자인 청황자(淸皇子) 임윤택이었다. 그 소년의 앞에 앉은 이는 윤택의 외숙(外叔)인 좌찬성 박진문과 그의 아들이자 윤택의 최측근인 승일이었다.


“어쨌든 황가의 피가 섞이진 않았다해도, 그는 황가의 일원이라 인정받았습니다. 그런 이가 7년 만에 들어오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지요. 게다가..”
“게다가 담현대군(潭玄大君)이 국무(國巫)의 계승자이기 때문입니까? 좌찬성대감.”


좌찬성인 박진문은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순백의 무복을 입은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었다.


“이거, 신녀(神女)께서 들으신게요.”
“갑작스레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청황자마마.”
“아닙니다, 신녀. 앉으시지요.”


윤택은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의자를 권했다. 그러자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그에게 권해진 곳에 앉았다.


“담현대군께서는 결코 황자마마께 해가 될 분은 아니실겁니다. 아니면, 국무의 도움 없이는 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하십니까?”
“신녀! 말이 지나치십니다.”
“대감께서도 알아두셔야지요. 황자저하를 걱정시키는 것이 그대의 일입니까?”
“외숙도 절 걱정하여 하시는겁니다, 신녀. 노여움을 거두시구려. 중요한 것은 신녀가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맞는가, 이것이 아니겠소?”


날카롭게 반문하는 그 모습에 윤택이 약간 강한 어조로 신녀를 향해 물었다. 그 말에 신녀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지은채 윤택을 바라봤다. 시선조차 피하지 않는 그 강인한 모습에 윤택이 잠시 멈칫하자, 신녀의 눈초리가 곱게 휘어졌다.


“담 현대군께서는 저보다 훨씬 강하고, 좋은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돕거나 하시진 않으실 테지만, 그래도 원망치는 마옵소서. 너무나 착하고, 고운 분이십니다. 저 같은 천녀(賤女)보다 훨씬 좋은 국무가 되실겁니다.”
“신녀의 그 말이, 조금 안심되는구려.”



*



“오늘, 궁으로 입궁하신다하시더니 떨리십니까?”
“안 떨린다면 거짓이겠지. 내, 고작해야 9살 아니더냐. 그러는 광선이 너는 전혀 떨리지 않는 모양이로구나.”
“저라고 어찌 아니떨리겠습니까? 다만, 저마저 떨면 명훈님을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광 선의 말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명훈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저보다 1살 더 작은 나이이거늘, 광선은 마치 제 형마냥 굴곤했다. 그런 광선의 행동이 명훈은 늘 기뻤다. 궁궐로 들어간다. 수많은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피한다고 피해질 운명이 아님을, 그 누구보다 뛰어난 명훈은 알고 있었다. 이럴때는 자신이 신을 모시는 무인(巫人)인것이 끔찍스럽게도 싫었다.


“담현대군마마. 궐로 입궐하실 때이시옵니다.”
“알겠네. 가자, 광선아. 이제 궐로 간다면, 난 내 이름보다 국무라는 호칭으로 불리겠지. 싫구나.”
“제가 명훈님의 이름을 불러드리겠습니다.”
“고맙다.”


명훈은 흔들리는 마차 위에서 눈을 감았다. 별은 제 운명의 상대가 궐에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허나, 신을 모시는 무인에게 운명의 상대라니.


“신의 뜻이란, 참으로 알기 어렵구나.”



*



“궐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네, 담현대군. 앞으로 그대가 이 천추국의 국무의 계승자로서 맡은바 임무를 다해주길 바라네.”
“네, 황제폐하.”
“앞으로 그대는 천신궁(天神宮 : 천추국의 황궁에 위치한 국무와 신녀의 처소. 황족조차 허락 없이 들어갈 수 없는 성역.)에서 거하도록 명한다.”


윤 택은 새하얀 옷을 입은 채 가만히 눈을 내리깐 소년을 바라봤다. 9살이라 듣긴 했지만, 참으로 어렸다. 저런 어린 아이에게 국무의 계승자라는 묵직한 직책을 수여하다니. 말이 계승자지, 고작해야 1~2년 상간에 저 아이가 국무가 될 것이 뻔했다. 신녀 또한 국무의 계승자라는 칭호를 받은 직후 3년 만에 계승한 터였다. 그것도 이례적으로 늦었다고 불리면서.
약간 창백하다 싶은 얼굴과 반대로 생기가 넘치는 눈동자가 잠시 윤택의 눈을 사로잡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랬기에 윤택은 조심스레 황제의 왼쪽을 응시했다. 황제보다 약간은 낮은 자리에 그 여자가 있었다. 새로이 국무가 된, 담현대군의 친모이자, 천추국의 2번째 황자인 진황자(進皇子) 임수언의 어미인 3황비가. 그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이제 6살 된 진황자의 모습도 보였다.


‘그러고 보면, 담현대군은 고작해야 3살 때 제 아비를 잃고, 1년 만에 신을 모신다는 이유로 무가(巫家)로 쫓겨나 버린 건가. 게다가 그 후 1년 만에 어미가 사별한 제 아비를 잊고, 황상의 비로 들어가 버리다니. 어찌 보면 안쓰러운 운명이로군.’


하지만, 안쓰러운 것은 안쓰러운 것이고, 윤택으로서는 저자가 택할 길이 걱정스러웠다. 신녀의 말대로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지만, 혹여 제 어미나 이부동생인 진황자의 편을 들어버리면 곤란해질 터였다.


‘확실히, 해두는 쪽이 좋긴 하지만...’


국무에게 함부로 접근하다가 곤란한 일이 생기면 안 될 터였다.


‘우선은, 두고 볼까...’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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