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더 이상 서로 상처는 주지 말자.'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에요, 선배?’
나
의 말을 알아들었음에도, 모르는 척 물어오는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원래 흰 편이기는 했지만, 저리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모습에 순간 울컥해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3년간 사귀어온 나의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었기에.
‘알아들었잖아.’
‘나는, 그런 식으론 못 알아들어요. 그러니까, 확실히, 확실히 말하세요.’
‘헤어지자.’
순
간 몸이 휘청한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 순간 손이 움찔하지만, 결국 앞으로 뻗어내지 않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가 제 자신을 추슬러 다시금 몸을 세운다. 그래, 쉬이 쓰러질 연인은 아니었다. 제 약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할 정도로 자존심강한 아이였다.
‘정말, 마음이 떠난거구나.’
‘...’
‘그래, 그동안 고마웠어요, 쇼 선배. 아니,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사쿠라이 선배.’
복
받쳐오는 울음을 참는 듯 잠긴 너의 목소리에,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는 낯설어진 호칭에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아니라고,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아이는 천천히 인사를 한 뒤 꼿꼿이 몸을 돌려 당당히 내 눈앞에서
멀어져갔다. 결코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아이는, 마지막까지 도도했다.
남은 한 달의 기간 동안 나와 아이는 서로를 본체만체했고, 방학이 지나 2학기가 개강했을 무렵 나는 아이가 학교를 휴학했음을 알게 되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그 말처럼, 그렇게 나는 3년의 연애에 끝을 고했다.
[사쿠쥰] 다시 한 번
“사쿠라이상-!”
“네.”
졸
업 후 취직한 T출판사에서 올해로 2년 차. 처음의 허둥허둥 거리며 혼란에 빠져있던 풋내기 편집자는 그 새 그럭저럭 능력 있다고
칭해지는 편집자로 통하고 있었다. 꽤나 잘생긴 외모에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한 사쿠라이에 대한 평판은 사내에서 칭찬이 줄을 이었고,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원고를 쉽사리 넘기지 않는 작가들에게서 원고를 받아내는 솜씨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런 사쿠라이이기에 편집장이 사쿠라이를 저리 불러대는 것은 아마 속 썩이는 작가 때문일 것이라, 사쿠라이의 뒷모습을 보며 편집부의 사람들은 그리 수군수군 거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추측은 정확했다.
“사쿠라이상. 혹시 작가 ‘J’에 대해 알고있나?”
“네.”
J.
필
명 외에는 외모도, 이름도, 나이도, 그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진 작가. 3년 전 처음으로 낸 소설이 크게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지금에 와서는 그 어딘가 담담하면서 직관적인 필체에 수많은 팬을 보유한 인기 작가였다. 현재는 T출판사 소속 잡지에
2주에 한 번, 소설을 적어내는 중이었다. 편집부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질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것에 대해
베일에 싸인 정체불명의 인물. 혹여 실존인물이 아닌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를 직접 담당한 담당편집가가 분명히 실존인물이라
얘기한터라 그저 편집부내에서도 도시전설 아닌 도시전설 화 되어있는 신비의 존재였다.
그
가 그리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처음 T출판사와 계약을 맺을 때, 혹시나 자신에 관한 어떤 사실이라도 발설 될 경우 당장에
소설을 모두 중단함과 동시에 법적 소송에 들어갈 것이라 확실하게 명시한 탓이었다. 워낙에 독특한 계약이라 편집부내에도 꽤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고, 2년 전에 입사한 사쿠라이도 그 계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J의 전담 편집가는 사토 메이상이었네만...”
말끝을 흐리는 편집장의 어조에 사쿠라이는 이해해버렸다.
사토 메이. 편집부내의 베테랑이자, 능력 있는 편집자인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이번에 출산휴가를 들어갈 예정이었다.
“자
네도 알다시피 사토상이 출산휴가를 들어가게 되었네. 사토상이 담당하던 작가가 한, 두명이 아니라 다른 편집자들에게 지금 일이
나눠지고 있는 중이라네. 그러니 부디 자네가 J의 편집자로서 들어가주겠나? 정 불편하다면 6개월정도의 기간만이라도 부탁하네.”
6개월.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뭐, 상관없겠다는 판단을 내린 사쿠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고맙네, 사쿠라이상.”
"아닙니다. 어려울 때 도와야지요."
사쿠라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
“여기야, 사쿠라이군.”
사
토 메이와 함께 첫 인사를 하기 위해 온 사쿠라이는 사토의 말에 저도 모르게 눈 앞에 놓인 맨션을 바라봤다. 인기작가라 그런지,
J의 숙소는 그럭저럭 좋은 집안 출신인 사쿠라이조차도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유명한 고급주택가들이 즐비한 곳에 위치한, 언 듯
보기에도 고급스러워보이는 맨션이었다.
“작가가 이렇게 수입이 좋은 직업이었나.”
“왜, 주눅이라도 드는거야? 나도 처음에야 그랬지. 그래도 J는 좋은 사람이야. 자, 어서 가자.”
당
황스러움에 절로 위축되는 사쿠라이를 보며 상냥하게 웃어 보인 사토는 익숙하게 J가 사는 집으로 그를 끌고 올라갔다. 깨끗하게
칠해진 흰 문 옆에 달린 초인종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눌러버린 사토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사쿠라이였으나, 그녀는 그저 쾌활하게
웃을 뿐이었다.
딩동- 딩동-
-네, 누구세요.
잠
시의 시간이 지나고 초인종 속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조금 낮은 남자의 목소리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사쿠라이는 저도
모르게 스피커를 응시했다. 이미 잊었다 생각했지만, 듣는 순간 지독하게 그리워지는 목소리는, 그에게 익숙했다. 그런 사쿠라이를
눈치채지 못한 사토는 그저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쥰군. 나야, 메이.”
-오늘은 약속일이 아닌데? 어쨌든 들어오세요.
조금 의아한 듯한 목소리로 골몰하던 남자는 곧이어 아무렇지 않은 듯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위치한 두 사람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3년의 시간동안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러나 이제는 아픔으로만 남은 그의 첫사랑이 눈앞에 편집자로 서있는 모습은 남자를, 마츠모토 쥰을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왜 그래, 쥰군?”
“..아니요. 들어오세요, 메이상.”
순간 어지러워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며, 마츠모토는 약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따끔해지는 고통에 간신히 제 모습을 유지한 마츠모토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집으로 들어섰다.
집
은 단정했다. 적절한 위치에 적절하게 배치한, 반드시 비싸지는 않더라도 풍광에 어울리는 좋은 가구와 깨끗하게 청소되어있는 깔끔한
집안. 하지만, 어딘가 사람이 사는 따스함이 없는 살풍경한 느낌의 집에서 유일하게 정리되지 못한 책상만이 그곳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짐작케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여기.”
거실에 위치한 쇼파에 앉은 사쿠라이와 사토의 모습에 가벼운 음료를 가져온 뒤 맞은편에 앉은 마츠모토는 사쿠라이의 시선을 피한 채 사토를 바라봤다. 혼란스러웠다.
“약속일이 아닌데 어쩐 일이세요? 또... 저 분은.”
“쥰
군도 알다시피 내가 임신중이잖아. 이제 출산휴가도 들어가야 하고해서, 편집자가 바뀌게 될 거야. 그런 의미에서 여기는 새로운
편집자인 사쿠라이 쇼군. 쇼군, 이쪽이 작가 J. 본명은 마츠모토 쥰. 자, 낯설겠지만, 서로 인사 나누도록 해.”
잠시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츠모토였다. 아직도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마츠모토는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오랫만, 이네요. 사쿠라이 선배.”
조금은 담담하게, 냉정하게 말해진 마츠모토의 인사에 순간 가슴에 욱씬거리는 통증을 느낀 사쿠라이였지만, 그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오랫만이네, 마츠모토군.”
“어머, 서로 아는 사이야?”
““대학 때, 후배(선배)에요.”“
동시에 발해진 말에 서로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사쿠라이와 마츠모토의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챈 사토는 이런 복잡한 관계에 억지로 끼어들 필요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 지나친 참견은 없느니만 못한 법이었다.
“두 사람, 얘기가 많을텐데 내가 비켜줄게. 그럼, 나 먼저 가볼게, 사쿠라이군, 쥰군. 당분간은 보기 힘들겠네.”
“...가시려고요?”
당황하며 일어서는 마츠모토의 모습에 웃으며 가볍게 포옹한 사토가 작게 속삭였다.
“두 사람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이 많아 보이니까.”
“그럼 건강해, 쥰군. 사쿠라이군도 내 대신 부탁해요.”
“아, 네.”
역
시나 연륜은 속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토를 배웅한 마츠모토는 순간 무겁게 가라앉은 집안의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버릇임에는 알고 있으나, 생각이 많아지고- 혼란스러울 때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행동이었다. 그런 마츠모토의 버릇을
아는 사쿠라이는 전혀 변하지 않는 마츠모토의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 얼마의 시간이 지났어도, 마츠모토는 마츠모토였다.
“작가 J가 쥰, 너인 줄은 몰랐어.”
“3년 전, 선배와 헤어지기 직전에 소설을 공모전에 냈었어요. 선배와 헤어진 뒤에 그 소설이 공모전에 합격한걸 알았고.”
담담하게 어조의 마츠모토였지만, 차마 사쿠라이를 직시할 수는 없는 모양인지 눈을 내리깐 채 조근조근 대답했다. 그 모습조차 너무나 그리운 과거, 그 자체라 사쿠라이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난 아직도 너의 사소한 버릇조차 잊지못했는데, 너는 어떤지, 묻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랬기에 사쿠라이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널 다시 만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저도, 선배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과거보다는 현재를 중시하는 사쿠라이였지만, 마츠모토는 예외였다. 사쿠라이에게 있어 마츠모토는 과거에도 그러했고, 현재도 그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앞으로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