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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묘한 17금 주의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철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제 품속에 있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시퍼런 칼날의 빛이 시리도록 눈을 파고들었다. 지독하게 비를 맞은 탓에 정신을 잃은 명훈의 몸이 뜨거웠다.






“하아.. 하아....”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히 볼에 손을 가져갔다. 성인임에도 보드라운 살결이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렸다.



내가 널 어찌 버리겠니. 이건, 버리는 게 아니다. 그저 내 목숨보다 널 더 소중히 여긴 것이야. 그러니 명훈아. 너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라. 내게 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윤택은 조심스레 명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안녕, 명훈아. 내 하나뿐인 정인아.











반란 외전 Side - Sad











따스한 봄의 햇살.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간신히 정신이 든 명훈이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토록 그립고 그립던 집이었다.






“정신이 드니, 명훈아?”

“서방님!! 제가 보이십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소중한 어머니와 제 지어미였다. 자신을 안고 눈물을 터뜨리는 부인과 계속해서 머리와 얼굴만 쓰다듬는 제 어미를 보고 있음에도 어딘가 마치 꿈같다. 그리 생각했다.


늦둥이인데다가 워낙에 몸이 약했던 터라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랐더랬다. 언제나 몸이 약한 막내아들을 귀이 여기던 어머니였지만, 어째서 저리 놀라고 기뻐하는지, 그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깨어나 다행이로구나.”

“아.. 버지..”






형편없이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명훈이 더 당황했다. 당최 어찌된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여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크게 앓았느니라. 하긴, 그럴 만도하지. 반란군에게 잡혀서 고생한데다가 체력도 약한 네가 산에 끌려가질 않나, 비를 맞아서 사경에 헤매는 상태인 널 인질로 삼을 만큼 지독한 반란분자였더구나.”

“관군이 널 구해 와서도 일주일이 넘게 사경을 헤맸단다. 정말,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깨어난 게야.”






아버지와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명훈은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은 윤택과 함께 산길을 헤매다가 비를 만나 동굴로 들어간 것 까지였다. 그런데 반란군에게 인질로 잡혔다?






“그 임윤택이라는 자. 지독하더구나. 네 어릴 적의 동무이면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쯧쯧."






그제서야 윤택에게 생각이 미친 명훈이 급히 몸을 일으키려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온몸에 퍼지는 지독한 고통.






“아직 몸이 낫지 않았는데 조심해야지!! 좀 더 누워있으렴.”

“반.. 란군은... 어찌되었습니까?”






힘겨운 명훈의 물음에 아버지인 김대감의 표정에서 안쓰러움과 분노가 스쳐지나갔다.






“주 모자인 홍경래와 우군칙, 그리고 널 납치한 임윤택은 효수(梟首)되었느니라. 살아있었다면 능지처참 후 그리되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죽어서 한성에 들어온 터라 그저 효수의 형벌만 받았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대역 죄인을 그리 쉬이 죽이다니.”






그 말에 명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날 버리고 갔으면 살 수 있었을 것을 왜.. 그런 것이오. 나 같은 놈 죽게 내버려두질 않고 왜....






“아직 몸이 채 낫질 않았는데 너무 심란한 얘기만 했구나. 쉬거라. 부인, 아가. 나가자꾸나.”

“네, 대감. 우리 아들, 좀 쉬거라.”

“서방님, 잠시 후 오겠습니다.”






그들이 나가자 명훈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저를 보며 환히 웃던 윤택이 생각나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저 제 몸을 탐하고, 제 신뢰를 져버렸고, 주상께 반역하는 대죄를 저지른 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그리웠다. 절 제 품에 묶어 날아가지 못하도록 길들이고선 사라져버린 자.






“내게 어쩌란 것이오, 대체 어쩌라고...”






가려진 명훈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간 신히 깨어난 명훈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지 벌써 한 달이 흘렀건만 명훈은 집밖으로 나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방에서 서책을 읽고 가끔 마당에 나와 넋을 잃은 듯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볼 뿐. 그런 명훈의 모습에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명훈은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이리 의욕이 없이 행동한 적은 없었기에 다들 당황했으나 워낙에 고생을 한터라 그런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님!!”

“현택아.”






그 런 명훈을 웃게 만드는 유일한 이는 이제 4살 난 명훈의 아들, 현택이었다. 제게 도도도 달려오는 어린 아이는 제법 무거워 가는 체격의 명훈에게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그는 아이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웠다. 아이의 이 온기가 이미 사라져버린 이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현택아! 너 아버님이 힘드실 터이니 그리 달라붙지 말라,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아버님이 좋은걸요.”






뚱한 표정으로 입을 내미는 모습이, 당돌한 그 어조가, 아이의 모든 것이 그리운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그가 어릴 적 저러했다.



아이는 제 핏줄임에도 놀라울 만큼 그와 닮아있었다.






“이 못난 아비가 좋으냐?”

“당연하지요! 전 세상에서 아버님이 제~일로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 이상으로 소중한 이가 없음이다. 난 네가 제일 좋다, 명훈아.」






제일 좋다하고 어찌 그리 떠나신거요?




아마 제 마음 속에 다시는 누군가가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평생토록 그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죽음이 편타 생각할 만큼 괴로워하면서 지내겠지.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주지 못한 이 마음, 그대를 대신해 이 아이에게만 온전히 쏟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떠난 그대의 잘못이니 뭐라 하지 마시오.


명훈은 힘주어 아이를 껴안았다. 그것은 바른 것도, 그 무엇도 아닐 테지만, 내게 남은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나도, 택이, 네가 제일 좋다.”


  

  

===



“어쩌면, 네가 가진 것을 다 버려야할지도 몰라.”






내가 가진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아비의 권세였고, 나는 그저 그 권세의 혜택을 받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지독하게 몸이 약해 어릴 적부터 날 사랑해주던 부모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이 못난 놈과 혼인한 부인과 이제 4살이 되었을 어린 아들을 생각하면 괴로웠지만, 사내의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미친 게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생각을 할까? 내 자신의 잔혹성이 무섭고, 이 욕망이 두렵다.





하지만, 사내의 온기를 놓치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윤택명훈] 반란(叛亂) 外傳 Side - Happy











바 로 지척까지 쫓아온 군관을 따돌리는 것은 엄청난 인내와 체력싸움이었다. 청나라의 국경만 넘어간다면 따라오지 못할 터. 게다가 열이 펄펄 끓는 명훈이가 오랜 시간 버틸 리가 만무했다. 몇 번이나 포기할까 생각도 했으나 그때마다 제 손을 부여잡는 명훈의 온기가 없었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 질긴 추적을 뿌리치고 간신히 청의 국경을 넘었을 때 명훈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한달이 넘게 의원에서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눈을 뜬 명훈이는 완전히 초췌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싹 메마른 입술로 간신히 달싹거리며 하는 말은 윤택의 눈물을 뽑아내기에 충분했다.






“왜, 그런, 표정인거야, 성은...”

“원망하지.. 않는 거냐?”

“내가, 선택, 했으니까.”






명훈은 그런 이였다. 제 선택에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런 단호한 녀석.






“행복하자, 명훈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우릴 살려준 다른 사람들 몫만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명훈의 모습을 보며 윤택은 명훈을 꽉 껴안았다. 내, 너의 이 온기를 놓치지 않을거다.








* * *








1820년 청나라 심양






"아니, 너무하지 않소!! 이것이 아무리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라 하나 어찌 이리 비싸단 말이오."

"싫으면 마시오. 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워낙에 자네가 단골이라 남겨둔 것인데 어찌 그런 소린가?"






상인의 말에 조선옷을 입은 사내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상당량의 가경통보를 건네고 받은 책은 그리 훌륭하거나 좋은 책은 아니었지만, 보고 기뻐할 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슬 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의 모습에 저를 걱정할 정인의 생각에 조금 걸음이 조급해졌다. 가볍게 식재료 몇 가지를 함께 산 그가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꽤나 한적한 시골마을 한켠의 작은 집이었다. 한 쪽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그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다녀왔다, 명훈아"

"아, 어서오시오, 형."






환히 웃으며 마중하는 명훈의 모습에 윤택은 환히 웃으며 명훈에게 다가갔다.






"서책이랑 가벼운 찬거리들을 사왔다."

"내 하면 된 다해도 그리 쓸데없이 부지런도하네."






타 박하듯 말하는 명훈이지만 실제 속내가 그렇지 않음을 아는 윤택은 식재료를 부엌에 넣어 둔 후 서책을 한쪽에 놔두고선 여전히 빨래에 신경 쓰는 명훈의 뒤로 다가가 그 작은 몸을 쏙 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내음이 윤택의 기분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남새스레 왜 그래?"

"네가 좋아서 그런다."






퉁명스런 명훈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윤택을 흘겨보는 명훈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너무도 귀여워, 윤택은 그저 웃었다.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1각(1각=15분정도)후면 벌써 해시(21시~23시)다. 어두워졌으니, 이제 방으로 들어가자."






윤택의 그 은근한 요구에 명훈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진것은 당연했다.











---









제 품속에서 흐트러진 채 깊은 잠에 빠진 명훈의 모습에 윤택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품에 안았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제 흔적을 몸에 남긴 채 잠든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윤택은 고개를 숙여 명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가져갔다.







"사랑한다, 명훈아."






잠든 명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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