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3. Cafe God Voice
노란 백열등이 깜빡이는 작고 어두운 방. 단촐한 살림살이만 존재하는 이 곳은 빌어먹게도 잘 아는 곳이었다.
지독한 술냄새와 짙은 화장품의 냄새, 그리고 사내와 여자의 살이 얽힐때 나는 그 비릿하고 역겨운 악취.
「하읏- 좋아! 더, 더.. 우읏-」
낡은 문 하나를 두고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성은 지독히도 잘 아는 것이었다.
피식-
싸
늘한 웃음이 나왔다. 몸을 팔아 하룻밤의 위안을 얻는게 무슨 기쁨인지는 모르겠지만, 끔찍했다. 저런 여자의 몸에서 난 나온것이다.
얼굴도 알지못하는 아비란 자도 아마 저 여자의 몸에 이끌렸겠지. 내 아비라는 남자에게 유일하게 감사하는 것은 저 여자- 이윤희의
성인 이씨가 아니라 김씨라는 전혀 다른 성을 주어 김명훈이라는, 여자와는 전혀 다른 이름을 준 것- 그 외에는 없었다.
여
자는 추하고 천박하지만, 그 외모는 발군이다. 어딘가 허무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유혹적인 그 미모는 약과 지독한 화장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지금도 여전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외모를 이용해 타인을 휘두르는것도. 그리고 그 빌어먹을 외모와 분위기는 그대로
나에게 주어졌다. 어미라는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자들 중에는 내게 흥미를 지닌 미친놈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당할만큼 멍청한
어린애는 아니었기에 피해왔지만.
내가 유일하게 저 어미라는 여자에게서 감사하는것인 동시에 증오하는것은 이 외모였다. 사람을 유혹하고, 매료시켜, 내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
문 틈 사이로 약과 쾌락으로 몽롱하게 풀린 여자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당신처럼 살지않아.
그런 나를 알듯 여자는 입가에 유려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그것은 내 뇌리에 끔찍하게 박혀들어왔다. 마치 저주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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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전화 받고 오늘 바로 튀어온거냐?”
“뭐, 전혀 아니라곤 안하지.”
승일의 놀려먹는 말에도 명훈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그저 웃을 뿐.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 틀린탓에 가만히 명훈을 바라보던 승일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퀭하고 초췌한 모습.
"또, 악몽이냐?"
아무런 대답없는 명훈의 모습에 승일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가끔 꾸는 그 악몽 이후의 명훈은 굉장이 불안정했다. 괜스레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기에 승일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다행히도 명훈은 그런 승일의 의도에 잘 따라줬다.
“어려보인다고 염색은 죽어도 안하더니 무슨 바람이냐? 게다가 스타일도 정반대.”
“뭐, 지금도 그다지 좋진 않아. 하지만, 귀여운 이미지로 윤택씨에게 낙인찍혀있는데, 그렇게 보여야 되지 않겠어?”
아주 푹 빠졌구만.
절
대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던 녀석이 이렇게 기를 쓰고 제 원래의 스타일마저 버린 채 매달리는 모습이 왠지 조금 낯선 느낌이라,
승일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변하지 않던 칠흑의 슈트가 아닌 밝은 갈색의 슈트, 새카맣던 머리칼은 밤갈색으로 변화시킬
만큼 한사람에게 빠져있다는게 얼마나 위험한지 승일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명훈이 이끄는 조직- 천회는 조폭이었고, 명훈에게
이끌리는 사람의 숫자만큼 적도 많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지나치게 빠져들지마. 너, 위험해진다.”
“나도, 알아.”
버릇처럼 짓고 있던 그 미소를 지은 얼굴은 굉장히 날카로워 승일은 쓰게 웃었다. 검사이던 자신마저 매혹시킬 만큼, 넌 매력적인 놈이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으니 너무 지나치게 포장하려 하지마.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 아는 승일이 걱정스레 명훈을 바라봤다. 그런 승일을 알듯, 명훈이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
형의 배려가 고마워.
나란 놈조차 걱정해주는 그 따스함이 고마워.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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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네요, 명훈씨."
“네, 오랜만이네요, 윤택씨.”
언
제나처럼 카페에 들린 윤택은 언제나처럼 햇빛이 따스한 창가에서 책에 푹 빠진 명훈을 발견하곤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요 근래
일주일정도 명훈이 거의 카페에 들리지 않았던 만큼 굉장히 반가웠다. 당연히 윤택은 자신이 왜 그렇게 명훈을 반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 무거워보이던 검은 슈트에 검은 양복이 아닌, 흰 셔츠에 갈색 정장바지, 그리고 멜빵으로 포인트를 준 그 모습이
조금은 더 어려 보여 윤택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은 스타일이 달라지셨네요?”
“안 그래도 조금 어색하네요.”
약간은 어색한 듯 웃는 그 미소가 너무나 예뻐서 윤택은 저도 모르게 순간 멈칫했다. 그 때 한쪽에서 광선과 얘기하며 웃던 승일이 명훈과 윤택쪽으로 다가왔다.
“명훈이는 프렌치바닐라 카푸치노일테고, 윤택씨는 아메리카노죠?”
둘 다 상당한 단골이니만큼 언제나 마시던 것을 물어본 승일이 멀어지자 윤택이 옅게 웃으며 명훈을 응시했다.
“단 걸 좋아하시나봐요. 늘 카푸치노시네요?”
“전 쓴 걸 싫어해서요. 윤택씨야말로 거의 아메리카노던데?”
“저는 단 것을 잘 못먹거든요.”
밝게 웃으며 대화를 주도하는 윤택과 여전히 얕은 어둠이 드리운 미소를 지은채 대화하는 명훈에게 커피를 가져다 준 후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한숨을 쉬면 행복이 달아난대요.”
“한두살먹은 애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거 걱정하냐?”
그
리 말한 승일이 불안한 듯 명훈을 응시했다. 명훈은 강한 녀석이 아니었다. 종종 다들 착각하곤하지만, 굉장히 약하고 섬세해 승일은
늘 명훈이 걱정되었다. 언제나 타인에게 지나치리만치 거리를 두는 녀석이기에 늘 불안했다. 그런 명훈이 이번엔 지나치게
빠져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보스, 불안해보이죠?"
"너도 그리 보이나보지?"
승
일의 물음에 광선은 그저 옅게 웃을뿐이었다. 고등학생때부터 명훈을 봐온 광선이다. 승일도, 광선도 어떤 의미로는 명훈에게
반해있다. 다만 그것이 사랑이 아닐뿐.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데는 사랑외에도 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그리고 김명훈은 사람을
매료시키는데 있어 타고난 면이 있었다.
"임윤택. 저 사람을 만난게 과연 명훈이에게 좋은걸까?"
"그건 모르죠. 다만 보스, 아니... 명훈형에게 상처를 준다면 용서치않아요."
광선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며 승일은 쓰게 웃었다. 명훈은 참 귀찮은 녀석이었다.
"나도, 아마 용서... 못할것 같긴하다."
그리 진지한 승일의 표정을 보던 광선이 씨익 장난스레 웃으며 승일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건 그거고.. 형, 되게 이뻐요."
"야! 대낮부터 미친짓할래?"
이 놈의 자식은 진지한 분위기 망치는덴 뭐가 있다니까!
날카로운 승일의 눈동자에도 광선은 헤헤 웃으며 볼에 입을 맞춘뒤 다다닥- 문 밖으로 달려나가버렸다. 순간 어이없이 당한 승일은 입으로는 툴툴거리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엷은 홍조가 띄워져있었다.
step four. 남매
“너, 뭐야?”
점
심시간에 조금 쉬어볼까 싶어 나온 뒤뜰엔 이미 한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햇볕을 쬐던 그가 인기척에 눈을 떠
물음을 던지는 그 모습이 주변 풍경과 너무나 자연스러워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투명하고 선명한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이
왠지 부끄러웠다.
"저, 전, 1학년 바, 박광선..입니다!"
"킥. 누가 잡아먹는대냐? 다음에 또 보자, 꼬맹아-"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하는 소리에 피식 웃으며 날 놀린 남자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상으로 작은 키와 메마른 체격의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멍하니 서있던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점심시간 종료의 벨이 울릴 때였다.
"예쁘다..."
"광선아, 너 무슨 일 있냐?"
점심시간만 되면 열심히 뒤뜰로 출근하는 내 모습에 친해진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이후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혹시나 알까싶어 물었다.
"키가 작고 하얀 피부에 뭐랄까, 예쁜 남잔데. 우리 학년은 아닌 것 같아. 유혹적? 아니, 매력적? 하여간 몸놀림이 가볍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남잔데 이쁘고, 유혹적이라니. 우리 학교 학생이야?"
"응."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자 옆에서 가만히 듣던 친구가 다가왔다.
"피부가 하얗고, 몸놀림이 가볍고, 유혹적인 키가 작은 남자? 그거 3학년에 김명훈선배 같은데?"
"김... 명훈?"
"아! 나도 알아. 남자면서도 색기? 하여간 묘한 분위기의 선배. 맞지? 그러고 보니까 네가 말하던 사람이랑 그 선배 분위기, 딱 맞아 떨어진긴하네. 근데, 그 선배... 일진이라고 들었는데??"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한 녀석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작게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명훈.
이름조차도 그 사람을 닮은 것 같다. 그리 생각을 하며 밖을 바라봤다.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싶었다.
---
♬So here I am with open arms~♪♩
얼
었던 날씨가 풀리며 조금은 따끈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승일의 카페는 드물게 한가했다. 카페의 유일한 손님이 되어버린 윤택과
명훈은 근 일주일만에 만난탓에 즐겁게 웃으며 한참동안 그다지 쓸모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랬던 윤택과 명훈의 대화가 끊긴
것은 명훈의 품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때문이었다. 이 시간에 자신에게 전화할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누구보다 명훈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응시하자 보이는 것은 하나의 이름이었다.
「김예림」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확 굳어버린 얼굴은 반가움과 기묘한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꽤나 보기 힘든 표정에 윤택이 의아한듯 말을 건넸다.
"전화, 안 받으세요?"
"받아야죠."
윤택의 걱정어린 말에 간신히 답한 명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응. 아아, 오랜만이야. 그래, 돌아온거야?"
'......'
"그건 왜?"
'.....'
"중요한 이야기? 여긴 서울예대 앞에 있는 카페. 갓보이스."
'.......'
"그래. 알았어. 어딘데? 광선이 보낼게."
'.......'
"아아. 그 곳에서 가만히 기다려. 그래, 조금있다가 보자."
전화를 끊은 명훈이 광선쪽을 향했다.
"박광선."
"네?"
"예림이. 인천국제공항에 있다니까, 좀 데리고 와라."
"예림...님이요? 한국에 돌아오신건가요??"
"그래. 부탁하마."
광선 또한 아는 사람인 듯 작게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광선을 보내자마자 깊은 고민에 빠진 명훈의 모습에 윤택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명훈씨?"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각할 일이 생겨서."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다음에 다시 뵐까요?"
"괜찮을까요?"
조
심스레 묻는 명훈의 말에 윤택이 낮게 웃었다. 첫인상과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귀엽고, 생각이상으로 섬세한 남자. 왠지 모르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분위기와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느낌을 지닌 독특한 사람. 왠지 헤어지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저렇게 심각한
분위기를 짓는 명훈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다음에는 좀 더 즐거운 시간이면 좋겠네요."
"저도요."
"그럼 명훈씨.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윤택씨."
윤
택이 웃으며 나가자 명훈이 깊은 한숨을 내쉰 뒤 테이블 위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아무리 피곤해도 제 자신의 공간이 아닌 이상
쉬이 풀어지지 않는 명훈임을 잘 아는 승일이 놀라 명훈에게 다가갔다. 명훈은 그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그 리듬에 승일이 아무런 말없이 명훈의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테이블만 두드리던 명훈이 입을 연 것은 30분이 넘게 지난 후였다.
"궁금한거지?"
"말해줄거냐?"
승일의 그 말에 명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김예림. 올해 27세. 내 아버지 김승조의 딸."
"잠깐. 그 말인 즉슨..."
"내 여동생."
담
담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당황한것은 승일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반의 교제기간동안 단 한번도 명훈의 가족관계에 대해
들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천회 수뇌부의 정보는 거의 없다싶이 했던 이유도 있어서 승일은 명훈이 그저
천회의 전신인 천강파의 보스, 김승조의 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외동이라고 생각해 왔던 탓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 처음듣는데?"
"단 한번도 말한적 없으니까. 말해두지만 여동생만이 아니라 남동생도 하나있어."
그 말에 황망히 명훈을 바라보던 승일이 정신을 차린 것은 딸랑이는 방울소리였다.
"다녀왔습니다."
"오빠!"
조심스러운 광선의 인사 바로뒤에 들리는 밝고 활달한 여성의 목소리. 조막만한 얼굴에 살짝 웨이브진 갈색 머리칼을 여자는 길을 가다가 한번쯤은 돌아볼법한 상당한 미인이었다.
"아아, 오랫만이야. 6개월 만이지?"
"응!"
"여기 승일씨는 카페 오너. 인사는?"
"안녕하세요! 명훈오빠 동생인 김예림이라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있게 얘기하는 예림의 모습에 쓴웃음 지은 명훈이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해. 주문은?"
"저는 화이트 핫초코."
명
훈의 그 말이 자리를 비켜줬음 한다는 은근한 의사표시임을 아는 승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쪽으로 사라지자 광선 또한 주방앞의
카운터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명훈이 예림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방금전까지의 밝고 활동적인 미소를 지운채 진지하게
명훈을 바라봤다.
"이렇게 급하게 귀국한 이유가 뭐야? 너 1년 정도 예상하고 갔잖아? 대윤이도 그 정도는 이해해줬고."
"형태때문에."
"형태? 형태가 왜?"
"형태, 경찰 된거는 알지? 이번에 강력계로 간대. 형태, 오빠 엄청 싫어, 아니, 혐오하는 수준인거. 알잖아?"
예림의 말에 명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림의 쌍둥이 동생이자 삼남매 중 막내인 형태는 명훈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예림이 명훈을 오빠라고 따르며 좋아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오로지 명훈에 대한 증오로 경찰이 될만큼.
"형태, 오빠도 알다싶이 천회의 전신인 천강파 시절부터 알고 있어. 아버지가 숨기기는 했다지만, 사실 그런거.. 한 집에 있으면서 모를리 없잖아?"
"그렇지."
"오빠가 천강파 장악하고 지금의 천회로 바꾸면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긴했다지만, 지금 남은 자료만으로도 천회, 어려워질 수도 있어. 난, 오빠가 걱정스러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예림에게 명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현재 연좌제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알게모르게 남은 은근한 차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될만큼 분노가 큰 형태의 행동이 걱정되지 않을리 없었다. 하지만.
"예림아. 천회, 그리 녹록한 조직이 아니라는 거, 알아둬라. 이 내가 그리 못난 조직, 만들것 같아?"
"후훗. 그건 그렇네."
"자, 여기 화이트핫초코 나왔습니다. 그리고 명훈이 네가 먹을 것도 여기."
"고마워. 자, 먹고 나가자. 대윤인?"
승일이 가져다 준 핫초코와 커피를 마시며 명훈이 밝은 목소리로 화재를 전환시켰다. 더이상 신경쓰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가 깃든 목소리였다. 예림 또한 그런 오빠의 화재전환에 환히 웃으며, 그러나 약간은 당황한채 얼굴을 붉혔다.
"3시 정각에 이 곳으로 오기로 했어."
"사이가 좋기도하지."
"놀리기 없기다-!"
"안놀려. 그럼 15분 남은건가?"
잠시 시계를 보던 명훈이 핫초코를 홀짝이는 예림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품 속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원권 수표를 몇장 꺼냈다.
"뭐야?"
"용돈. 너 남자친구도 만나고하려면 부족할거아냐? 게다가 6개월만의 귀국이면 돈도 별로 안들고 있을꺼고."
"그건,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예림의 모습에 명훈이 낮게 웃으며 수표를 예림쪽으로 밀었다.
"받아둬. 아, 그분은?"
"응? 아, 엄마?? 잘계셔. 뭐, 엄마야 언제나처럼 우아하시지. 조금 몸이 안좋긴한데, 그거야 워낙에 몸이 약한분이시니까. 엄마도 조심해. 울 엄마, 오빠 별로 달갑잖아 하시는거, 오빠가 더 잘알잖아."
"아아-"
예림의 말에 어딘가 미묘하게 웃은 명훈이 빈 잔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명훈의 모습에 돈을 챙긴 예림 또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대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된 탓이었다.
"나가자. 형, 나 가볼께요."
"아아- 잘가. 잘가세요, 예림씨."
"네."
"광선이도 잘가고."
"조금뒤에 뵈요."
배웅하는 승일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온 명훈과 광선, 예림의 눈에 약간은 마른 체국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바쁘게 달려오는 모습에 예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랫만이다, 대윤아."
"안녕하세요, 명훈형. 광선형. 오랫만이야, 예림아."
명훈의 인사에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은 대윤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약간은 쑥스러운 듯 웃는 대윤의 모습에 밝은 모습이 아닌, 새침떼기 아가씨마냥 웃은 예림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해줄거지?"
"네, 공주님."
그런 예림의 모습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정중하게 잡은 대윤의 모습이 맘에 든 듯, 예림이 명훈과 광선을 바라봤다.
"가볼께요, 오빠. 광선오빠도 고마워요."
"가보겠습니다."
"날이 풀렸어도 추우니까, 늦게까지 돌아다니진 마라."
왠지 충고하는 자신이 늙은이같은 느낌에 명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배웅하자 예림과 대윤또한 환한 미소를 지은채 멀어져갔다. 서로 팔짱을 낀 채 밝게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이 안보일때쯤, 명훈의 표정이 굳었다.
"박광선."
"네?"
"정보, 차단해라. 김형태가 경찰로서 제대로 우릴 잡아보려는 모양인데... 그리 쉽지 않다는걸 알아야지. 그리고 미국에서 부인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잘 살펴. 그분도 날 달갑지 않아하시는건 알잖아?"
서늘한 어조에 그저 고개를 숙인 광선을 응시하던 명훈이 입가에 얇은 호선을 그렸다.
"천회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거. 알아야지. 김형태."
---
"이번에 우리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1반에 부임한 김형태경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약간은 날카롭게 생긴 미형의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강력계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의 환대를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만은 싸늘하게 빛났다.
'두고봐. 천회, 무너뜨려주지.'
step five. 무적파
“보스. 무적파에 대해서 어떻게 할까요?”
“흐음... 우선은 놔둬.”
“네?”
광선은 자신도 모르게 명훈에게 되물었다. 평상시라면 그런 광선에게 핀잔을 줄 명훈은 그저 나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냥 놔둬도 되는겁니까?”
“아아- 괜한 부스럼을 만들필욘없지. 이건 빚으로 남겨두는게 나아. 무적파쪽에서는 조금 속이탈지도 모르겠는걸. 큭큭.”
“아...”
“적당히, 항의문정도나 보내. 다음에는 이런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네”
광선이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명훈이 눈을 빛냈다. 어쨌든, 상당한 힘과 무력을 지닌 무적파의 보스에게 이런식의 빚을 만들어 둔다면, 이득을 보는 것은 천회였다.
“이거ㅡ, 감사히 여겨야겠는걸. 아하하핫!”
---
방
은 어두웠지만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치된 고급 가구들과 장식품. 그 곳에 위치한 고급 마호가니 책상을 마주보고
앉은 중년의 남자와 남자의 앞에서 공손하게 보고중인 사내가 있었다. 암갈색 정장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멋지게 빗어 내린 중년인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져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임수혁」이라는 상아로 만든 고급 명패가 있었다.
“독사파놈들이 당했다고?”
“네.”
“어차피 일회용이다. 상관없어.”
“천회놈들이 저희가 뒤에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습니다. 여기, 그들의 항의문입니다.”
그 말에 무심히 답하던 남자, 임수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흰색의 봉투를 받아들었다. 빠른 속도로 편지를 꺼내들어 훑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제일 빚을 만들고 싶지 않는 상대에게 빚을 만들어버렸군. 곤란해, 곤란해. 김명훈, 그 영악한 새끼가 그냥 넘길 리는 없을 테니.”
“천회를 한번 엮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새끼들이 켕길만한 짓거리 하겠냐? 그것도 김명훈 그 새끼가? 뭘로? 폭력? 매매?”
“드러그(drug-마약의 속어)라던가.”
남자의 말에 그는 피식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애새끼주제에 얼마나 철저한지 모르는거냐?”
“진실이든, 아니든, 그냥 엮어버리면 수사가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는 약간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생각은 가상하다만 그것은 김명훈을 너무 손쉽게 본 얘기였다.
“쯔쯧. 너도 아직 어리군. 윤민이 네가 앞으로 이 조직을 이어받을 거라면 알아둬라. 확실하고 정확한 증거 없이 천회, 아니, 김명훈 그 자식을 철창에 집어넣으려면 도리어 네가 당한다는걸.”
“네?”
임수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윤민에게 의자에 앉도록 지시한 뒤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윤민은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 놈은 , 이윤화, 그 년을 너무 많이 닮았다.”
“이윤화...?”
“적
어도 우리나라에 나이 꽤나 있고, 이름 꽤나 알려진 놈 중에서 그 년 치맛자락에 휘감겨보지 않은 놈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계집이지.
정·재계는 물론이요, 연예계, 학계 등. 분야를 불문하고 그 계집 모르는 사내놈이 있을까 싶을 만큼.”
“그래봤자, 고작 창부계집 아닙니까?”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 윤민에게 임수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
래. 그냥 창부계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윤화, 그 갈보년이 얼마나 교활하고 잔악한 계집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좌지우지 하던 잔망스러운 년이, 그 외모만은 발군이라 사람을 끌어들이지. 팜프파탈이라하지? 그
계집이 그러했다. 사내들이 제 살 파먹는걸 알면서도 그 계집을 끊지를 못해 찾게 되는 요부. 그 계집이 나이를 먹고, 애를 낳은
뒤, 약에 취해도 그 미모가 시들기는커녕, 퇴폐적이고 허망해서 사내들이 그 년을 못 안아서 난리였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리
살았지. 완전히 약에 취해 죽기 직전까지도.”
“...”
“김명훈. 그 애새끼가, 그 계집년을 쏙 빼어 닮았지. 사람
유혹하는 모양새하며, 뒤에서 정보가지고 사람들 조종하는 꼴하며. 그 계집년이 남긴 정보, 다 그 놈이 가지고 있어. 지금
이윤화, 그 년 품에 안은 놈치고 김명훈 그 자식에게 세게 나갈 수 있을만한 사람, 높으신 분들 중에는 아무도 없을 꺼다. 우리가
그 놈 치려다가 되려 당해버리고 말테지.”
임수혁은 잠시 눈을 감고 이윤화를 생각했다. 화사한 미모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던 색기. 그저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남자를 유혹하던 그 천부적인 재능. 나름대로 냉정하다
생각했던 자신마저 순간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넋을 잃을 만큼 놀랐었다. 그리고 그 재능을 천회의 그 애송이 놈도 지니고 있었다.
슬쩍 웃고,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런 재능이.
“그 놈이 계집년이었으면, 더 힘들었겠지. 그런 계집, 이윤화, 그 하나로도 족하니까.”
제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민의 모습에도 임수혁의 얼굴은 좋아지질 않았다. 말은 그리 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김명훈은
계집은 아니었지만, 제 아비와 제 어미의 재능을 제대로 이어받은 놈이었다. 제 어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을 매료시키고, 제
아비처럼 다수의 사람들을 조종하는 카리스마. 그 모든 것을 갖춘 녀석.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해야 4년 만에 천회를 이정도로
키워내질 못했을 터였다.
어떤 의미로는 임윤화나 제 아비인 김승조 이상의 위험인물. 그런 녀석에게 제 아들이자 no.2인 윤민이 맞설 수 있을지,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었다.
“그 새끼, 약점을 찾아봐. 천회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면 좋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뭐라도 좋아."
“네.”
---
“맛있어!”
아이스크림을 한입 크게 입에 넣은 명훈이 한없이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헤실거렸다.
“좋아요?”
“네!”
그
야말로 어린애마냥 웃는 모습에 윤택의 얼굴 또한 다정하게 변했다. 윤택 자신은 저렇게 단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명훈이 저리
웃는 모습을 보니 제 기분마저 좋아진 탓이었다. 꽤나 큰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던 윤택이 갑자기
생각난듯 입을 열었다.
“아! 명훈씨. 혹시, 놀이공원 좋아해요?”
“?”
“우연히 티켓이 생겼는데, 같이 가실래요?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어때요?”
“저는 영광이죠.”
명훈의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윤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이제 수업이라 이만 일어날께요. 그럼 일요일에 뵈요.”
“네!”
윤택이 사라지자 명훈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승일과 광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갈꺼지?”
“네.”
광선의 대답에 안심한 듯 한 명훈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부끄러운 듯 웃었다. 설마하니 윤택이 먼저 약속을 제안할 줄은 몰랐던 터라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렸다.
“아아. 기대된다.”
* 명훈이 엄마이름 이윤희->이윤화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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