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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3. Cafe God Voice





노란 백열등이 깜빡이는 작고 어두운 방. 단촐한 살림살이만 존재하는 이 곳은 빌어먹게도 잘 아는 곳이었다.
지독한 술냄새와 짙은 화장품의 냄새, 그리고 사내와 여자의 살이 얽힐때 나는 그 비릿하고 역겨운 악취.




「하읏- 좋아! 더, 더.. 우읏-」




낡은 문 하나를 두고 들려오는 여자의 신음성은 지독히도 잘 아는 것이었다.



피식-



싸 늘한 웃음이 나왔다. 몸을 팔아 하룻밤의 위안을 얻는게 무슨 기쁨인지는 모르겠지만, 끔찍했다. 저런 여자의 몸에서 난 나온것이다. 얼굴도 알지못하는 아비란 자도 아마 저 여자의 몸에 이끌렸겠지. 내 아비라는 남자에게 유일하게 감사하는 것은 저 여자- 이윤희의 성인 이씨가 아니라 김씨라는 전혀 다른 성을 주어 김명훈이라는, 여자와는 전혀 다른 이름을 준 것- 그 외에는 없었다.
여 자는 추하고 천박하지만, 그 외모는 발군이다. 어딘가 허무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유혹적인 그 미모는 약과 지독한 화장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지금도 여전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 외모를 이용해 타인을 휘두르는것도. 그리고 그 빌어먹을 외모와 분위기는 그대로 나에게 주어졌다. 어미라는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자들 중에는 내게 흥미를 지닌 미친놈들도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 당할만큼 멍청한 어린애는 아니었기에 피해왔지만.
내가 유일하게 저 어미라는 여자에게서 감사하는것인 동시에 증오하는것은 이 외모였다. 사람을 유혹하고, 매료시켜, 내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
문 틈 사이로 약과 쾌락으로 몽롱하게 풀린 여자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당신처럼 살지않아.



그런 나를 알듯 여자는 입가에 유려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그것은 내 뇌리에 끔찍하게 박혀들어왔다. 마치 저주마냥.







---







“어제 전화 받고 오늘 바로 튀어온거냐?”
“뭐, 전혀 아니라곤 안하지.”




승일의 놀려먹는 말에도 명훈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그저 웃을 뿐.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 틀린탓에 가만히 명훈을 바라보던 승일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퀭하고 초췌한 모습.




"또, 악몽이냐?"




아무런 대답없는 명훈의 모습에 승일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가끔 꾸는 그 악몽 이후의 명훈은 굉장이 불안정했다. 괜스레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기에 승일은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다행히도 명훈은 그런 승일의 의도에 잘 따라줬다.




“어려보인다고 염색은 죽어도 안하더니 무슨 바람이냐? 게다가 스타일도 정반대.”
“뭐, 지금도 그다지 좋진 않아. 하지만, 귀여운 이미지로 윤택씨에게 낙인찍혀있는데, 그렇게 보여야 되지 않겠어?”




아주 푹 빠졌구만.



절 대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던 녀석이 이렇게 기를 쓰고 제 원래의 스타일마저 버린 채 매달리는 모습이 왠지 조금 낯선 느낌이라, 승일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결코 변하지 않던 칠흑의 슈트가 아닌 밝은 갈색의 슈트, 새카맣던 머리칼은 밤갈색으로 변화시킬 만큼 한사람에게 빠져있다는게 얼마나 위험한지 승일은 알고 있었다. 어쨌든 명훈이 이끄는 조직- 천회는 조폭이었고, 명훈에게 이끌리는 사람의 숫자만큼 적도 많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지나치게 빠져들지마. 너, 위험해진다.”
“나도, 알아.”




버릇처럼 짓고 있던 그 미소를 지은 얼굴은 굉장히 날카로워 승일은 쓰게 웃었다. 검사이던 자신마저 매혹시킬 만큼, 넌 매력적인 놈이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으니 너무 지나치게 포장하려 하지마.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 아는 승일이 걱정스레 명훈을 바라봤다. 그런 승일을 알듯, 명훈이 낮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




형의 배려가 고마워.
나란 놈조차 걱정해주는 그 따스함이 고마워.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서 고마워.







---







"오랜만에 뵙네요, 명훈씨."
“네, 오랜만이네요, 윤택씨.”




언 제나처럼 카페에 들린 윤택은 언제나처럼 햇빛이 따스한 창가에서 책에 푹 빠진 명훈을 발견하곤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요 근래 일주일정도 명훈이 거의 카페에 들리지 않았던 만큼 굉장히 반가웠다. 당연히 윤택은 자신이 왜 그렇게 명훈을 반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 무거워보이던 검은 슈트에 검은 양복이 아닌, 흰 셔츠에 갈색 정장바지, 그리고 멜빵으로 포인트를 준 그 모습이 조금은 더 어려 보여 윤택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은 스타일이 달라지셨네요?”
“안 그래도 조금 어색하네요.”




약간은 어색한 듯 웃는 그 미소가 너무나 예뻐서 윤택은 저도 모르게 순간 멈칫했다. 그 때 한쪽에서 광선과 얘기하며 웃던 승일이 명훈과 윤택쪽으로 다가왔다.




“명훈이는 프렌치바닐라 카푸치노일테고, 윤택씨는 아메리카노죠?”




둘 다 상당한 단골이니만큼 언제나 마시던 것을 물어본 승일이 멀어지자 윤택이 옅게 웃으며 명훈을 응시했다.




“단 걸 좋아하시나봐요. 늘 카푸치노시네요?”
“전 쓴 걸 싫어해서요. 윤택씨야말로 거의 아메리카노던데?”
“저는 단 것을 잘 못먹거든요.”




밝게 웃으며 대화를 주도하는 윤택과 여전히 얕은 어둠이 드리운 미소를 지은채 대화하는 명훈에게 커피를 가져다 준 후 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 한숨을 쉬면 행복이 달아난대요.”
“한두살먹은 애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거 걱정하냐?”




그 리 말한 승일이 불안한 듯 명훈을 응시했다. 명훈은 강한 녀석이 아니었다. 종종 다들 착각하곤하지만, 굉장히 약하고 섬세해 승일은 늘 명훈이 걱정되었다. 언제나 타인에게 지나치리만치 거리를 두는 녀석이기에 늘 불안했다. 그런 명훈이 이번엔 지나치게 빠져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보스, 불안해보이죠?"
"너도 그리 보이나보지?"




승 일의 물음에 광선은 그저 옅게 웃을뿐이었다. 고등학생때부터 명훈을 봐온 광선이다. 승일도, 광선도 어떤 의미로는 명훈에게 반해있다. 다만 그것이 사랑이 아닐뿐. 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데는 사랑외에도 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그리고 김명훈은 사람을 매료시키는데 있어 타고난 면이 있었다.




"임윤택. 저 사람을 만난게 과연 명훈이에게 좋은걸까?"
"그건 모르죠. 다만 보스, 아니... 명훈형에게 상처를 준다면 용서치않아요."




광선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보며 승일은 쓰게 웃었다. 명훈은 참 귀찮은 녀석이었다.




"나도, 아마 용서... 못할것 같긴하다."




그리 진지한 승일의 표정을 보던 광선이 씨익 장난스레 웃으며 승일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건 그거고.. 형, 되게 이뻐요."
"야! 대낮부터 미친짓할래?"




이 놈의 자식은 진지한 분위기 망치는덴 뭐가 있다니까!



날카로운 승일의 눈동자에도 광선은 헤헤 웃으며 볼에 입을 맞춘뒤 다다닥- 문 밖으로 달려나가버렸다. 순간 어이없이 당한 승일은 입으로는 툴툴거리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엷은 홍조가 띄워져있었다.





step four. 남매







“너, 뭐야?”





점 심시간에 조금 쉬어볼까 싶어 나온 뒤뜰엔 이미 한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롭게 햇볕을 쬐던 그가 인기척에 눈을 떠 물음을 던지는 그 모습이 주변 풍경과 너무나 자연스러워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투명하고 선명한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이 왠지 부끄러웠다.





"저, 전, 1학년 바, 박광선..입니다!"
"킥. 누가 잡아먹는대냐? 다음에 또 보자, 꼬맹아-"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하는 소리에 피식 웃으며 날 놀린 남자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상으로 작은 키와 메마른 체격의 그가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멍하니 서있던 내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은 점심시간 종료의 벨이 울릴 때였다.





"예쁘다..."






"광선아, 너 무슨 일 있냐?"





점심시간만 되면 열심히 뒤뜰로 출근하는 내 모습에 친해진 녀석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이후로 그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혹시나 알까싶어 물었다.





"키가 작고 하얀 피부에 뭐랄까, 예쁜 남잔데. 우리 학년은 아닌 것 같아. 유혹적? 아니, 매력적? 하여간 몸놀림이 가볍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남잔데 이쁘고, 유혹적이라니. 우리 학교 학생이야?"
"응."





내 말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자 옆에서 가만히 듣던 친구가 다가왔다.





"피부가 하얗고, 몸놀림이 가볍고, 유혹적인 키가 작은 남자? 그거 3학년에 김명훈선배 같은데?"
"김... 명훈?"
"아! 나도 알아. 남자면서도 색기? 하여간 묘한 분위기의 선배. 맞지? 그러고 보니까 네가 말하던 사람이랑 그 선배 분위기, 딱 맞아 떨어진긴하네. 근데, 그 선배... 일진이라고 들었는데??"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한 녀석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작게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명훈.


이름조차도 그 사람을 닮은 것 같다. 그리 생각을 하며 밖을 바라봤다.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싶었다.







---







♬So here I am with open arms~♪♩



얼 었던 날씨가 풀리며 조금은 따끈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승일의 카페는 드물게 한가했다. 카페의 유일한 손님이 되어버린 윤택과 명훈은 근 일주일만에 만난탓에 즐겁게 웃으며 한참동안 그다지 쓸모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랬던 윤택과 명훈의 대화가 끊긴 것은 명훈의 품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때문이었다. 이 시간에 자신에게 전화할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누구보다 명훈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응시하자 보이는 것은 하나의 이름이었다.


「김예림」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어딘지 모르게 확 굳어버린 얼굴은 반가움과 기묘한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꽤나 보기 힘든 표정에 윤택이 의아한듯 말을 건넸다.





"전화, 안 받으세요?"
"받아야죠."





윤택의 걱정어린 말에 간신히 답한 명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응. 아아, 오랜만이야. 그래, 돌아온거야?"
'......'
"그건 왜?"
'.....'
"중요한 이야기? 여긴 서울예대 앞에 있는 카페. 갓보이스."
'.......'
"그래. 알았어. 어딘데? 광선이 보낼게."
'.......'
"아아. 그 곳에서 가만히 기다려. 그래, 조금있다가 보자."





전화를 끊은 명훈이 광선쪽을 향했다.





"박광선."
"네?"
"예림이. 인천국제공항에 있다니까, 좀 데리고 와라."
"예림...님이요? 한국에 돌아오신건가요??"
"그래.  부탁하마."





광선 또한 아는 사람인 듯 작게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광선을 보내자마자 깊은 고민에 빠진 명훈의 모습에 윤택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명훈씨?"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각할 일이 생겨서."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다음에 다시 뵐까요?"
"괜찮을까요?"





조 심스레 묻는 명훈의 말에 윤택이 낮게 웃었다. 첫인상과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귀엽고, 생각이상으로 섬세한 남자. 왠지 모르게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분위기와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느낌을 지닌 독특한 사람. 왠지 헤어지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저렇게 심각한 분위기를 짓는 명훈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다음에는 좀 더 즐거운 시간이면 좋겠네요."
"저도요."
"그럼 명훈씨.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윤택씨."





윤 택이 웃으며 나가자 명훈이 깊은 한숨을 내쉰 뒤 테이블 위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아무리 피곤해도 제 자신의 공간이 아닌 이상 쉬이 풀어지지 않는 명훈임을 잘 아는 승일이 놀라 명훈에게 다가갔다. 명훈은 그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톡- 톡- 톡-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그 리듬에 승일이 아무런 말없이 명훈의 앞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테이블만 두드리던 명훈이 입을 연 것은 30분이 넘게 지난 후였다.





"궁금한거지?"
"말해줄거냐?"





승일의 그 말에 명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김예림. 올해 27세. 내 아버지 김승조의 딸."
"잠깐. 그 말인 즉슨..."
"내 여동생."





담 담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당황한것은 승일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년반의 교제기간동안 단 한번도 명훈의 가족관계에 대해 들어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천회 수뇌부의 정보는 거의 없다싶이 했던 이유도 있어서 승일은 명훈이 그저 천회의 전신인 천강파의 보스, 김승조의 아들이라는 사실. 하나만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외동이라고 생각해 왔던 탓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 처음듣는데?"
"단 한번도 말한적 없으니까. 말해두지만 여동생만이 아니라 남동생도 하나있어."





그 말에 황망히 명훈을 바라보던 승일이 정신을 차린 것은 딸랑이는 방울소리였다.





"다녀왔습니다."
"오빠!"





조심스러운 광선의 인사 바로뒤에 들리는 밝고 활달한 여성의 목소리. 조막만한 얼굴에 살짝 웨이브진 갈색 머리칼을 여자는 길을 가다가 한번쯤은 돌아볼법한 상당한 미인이었다.





"아아, 오랫만이야. 6개월 만이지?"
"응!"
"여기 승일씨는 카페 오너. 인사는?"
"안녕하세요! 명훈오빠 동생인 김예림이라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있게 얘기하는 예림의 모습에 쓴웃음 지은 명훈이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서 얘기해. 주문은?"
"저는 화이트 핫초코."





명 훈의 그 말이 자리를 비켜줬음 한다는 은근한 의사표시임을 아는 승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쪽으로 사라지자 광선 또한 주방앞의 카운터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명훈이 예림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방금전까지의 밝고 활동적인 미소를 지운채 진지하게 명훈을 바라봤다.





"이렇게 급하게 귀국한 이유가 뭐야? 너 1년 정도 예상하고 갔잖아? 대윤이도 그 정도는 이해해줬고."
"형태때문에."
"형태? 형태가 왜?"
"형태, 경찰 된거는 알지? 이번에 강력계로 간대. 형태, 오빠 엄청 싫어, 아니, 혐오하는 수준인거. 알잖아?"





예림의 말에 명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림의 쌍둥이 동생이자 삼남매 중 막내인 형태는 명훈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예림이 명훈을 오빠라고 따르며 좋아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오로지 명훈에 대한 증오로 경찰이 될만큼.





"형태, 오빠도 알다싶이 천회의 전신인 천강파 시절부터 알고 있어. 아버지가 숨기기는 했다지만, 사실 그런거.. 한 집에 있으면서 모를리 없잖아?"
"그렇지."
"오빠가 천강파 장악하고 지금의 천회로 바꾸면서 자료가 거의 소실되긴했다지만, 지금 남은 자료만으로도 천회, 어려워질 수도 있어. 난, 오빠가 걱정스러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예림에게 명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현재 연좌제가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알게모르게 남은 은근한 차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될만큼 분노가 큰 형태의 행동이 걱정되지 않을리 없었다. 하지만.





"예림아. 천회, 그리 녹록한 조직이 아니라는 거, 알아둬라. 이 내가 그리 못난 조직, 만들것 같아?"
"후훗. 그건 그렇네."
"자, 여기 화이트핫초코 나왔습니다. 그리고 명훈이 네가 먹을 것도 여기."
"고마워. 자, 먹고 나가자. 대윤인?"





승일이 가져다 준 핫초코와 커피를 마시며 명훈이 밝은 목소리로 화재를 전환시켰다. 더이상 신경쓰지 않겠다는 그런 의지가 깃든 목소리였다. 예림 또한 그런 오빠의 화재전환에 환히 웃으며, 그러나 약간은 당황한채 얼굴을 붉혔다.





"3시 정각에 이 곳으로 오기로 했어."
"사이가 좋기도하지."
"놀리기 없기다-!"
"안놀려. 그럼 15분 남은건가?"





잠시 시계를 보던 명훈이 핫초코를 홀짝이는 예림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품 속에서 지갑을 꺼내 십만원권 수표를 몇장 꺼냈다.





"뭐야?"
"용돈. 너 남자친구도 만나고하려면 부족할거아냐? 게다가 6개월만의 귀국이면 돈도 별로 안들고 있을꺼고."
"그건, 그렇지만...."





말끝을 흐리는 예림의 모습에 명훈이 낮게 웃으며 수표를 예림쪽으로 밀었다.





"받아둬. 아, 그분은?"
"응? 아, 엄마?? 잘계셔. 뭐, 엄마야 언제나처럼 우아하시지. 조금 몸이 안좋긴한데, 그거야 워낙에 몸이 약한분이시니까. 엄마도 조심해. 울 엄마, 오빠 별로 달갑잖아 하시는거, 오빠가 더 잘알잖아."
"아아-"





예림의 말에 어딘가 미묘하게 웃은 명훈이 빈 잔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명훈의 모습에 돈을 챙긴 예림 또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대윤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된 탓이었다.





"나가자. 형, 나 가볼께요."
"아아- 잘가. 잘가세요, 예림씨."
"네."
"광선이도 잘가고."
"조금뒤에 뵈요."





배웅하는 승일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온 명훈과 광선, 예림의 눈에 약간은 마른 체국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바쁘게 달려오는 모습에 예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랫만이다, 대윤아."
"안녕하세요, 명훈형. 광선형. 오랫만이야, 예림아."





명훈의 인사에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은 대윤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약간은 쑥스러운 듯 웃는 대윤의 모습에 밝은 모습이 아닌, 새침떼기 아가씨마냥 웃은 예림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해줄거지?"
"네, 공주님."





그런 예림의 모습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정중하게 잡은 대윤의 모습이 맘에 든 듯, 예림이 명훈과 광선을 바라봤다.





"가볼께요, 오빠. 광선오빠도 고마워요."
"가보겠습니다."
"날이 풀렸어도 추우니까, 늦게까지 돌아다니진 마라."





왠지 충고하는 자신이 늙은이같은 느낌에 명훈이 어색하게 웃으며 배웅하자 예림과 대윤또한 환한 미소를 지은채 멀어져갔다. 서로 팔짱을 낀 채 밝게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두 사람이 안보일때쯤, 명훈의 표정이 굳었다.





"박광선."
"네?"
"정보, 차단해라. 김형태가 경찰로서 제대로 우릴 잡아보려는 모양인데... 그리 쉽지 않다는걸 알아야지. 그리고 미국에서 부인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잘 살펴. 그분도 날 달갑지 않아하시는건 알잖아?"





서늘한 어조에 그저 고개를 숙인 광선을 응시하던 명훈이 입가에 얇은 호선을 그렸다.





"천회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거. 알아야지. 김형태."






---






"이번에 우리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 1반에 부임한 김형태경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약간은 날카롭게 생긴 미형의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며 강력계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의 환대를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띄고 있었지만, 눈만은 싸늘하게 빛났다.





'두고봐. 천회, 무너뜨려주지.'






step five. 무적파



“보스. 무적파에 대해서 어떻게 할까요?”
“흐음... 우선은 놔둬.”
“네?”


광선은 자신도 모르게 명훈에게 되물었다. 평상시라면 그런 광선에게 핀잔을 줄 명훈은 그저 나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냥 놔둬도 되는겁니까?”
“아아- 괜한 부스럼을 만들필욘없지. 이건 빚으로 남겨두는게 나아. 무적파쪽에서는 조금 속이탈지도 모르겠는걸. 큭큭.”
“아...”
“적당히, 항의문정도나 보내. 다음에는 이런식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네”


광선이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명훈이 눈을 빛냈다. 어쨌든, 상당한 힘과 무력을 지닌 무적파의 보스에게 이런식의 빚을 만들어 둔다면, 이득을 보는 것은 천회였다.


“이거ㅡ, 감사히 여겨야겠는걸. 아하하핫!”



---



방 은 어두웠지만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배치된 고급 가구들과 장식품. 그 곳에 위치한 고급 마호가니 책상을 마주보고 앉은 중년의 남자와 남자의 앞에서 공손하게 보고중인 사내가 있었다. 암갈색 정장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멋지게 빗어 내린 중년인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져있었는데 그의 앞에는 「임수혁」이라는 상아로 만든 고급 명패가 있었다.


“독사파놈들이 당했다고?”
“네.”
“어차피 일회용이다. 상관없어.”
“천회놈들이 저희가 뒤에 있다는 걸 알아챈 것 같습니다. 여기, 그들의 항의문입니다.”


그 말에 무심히 답하던 남자, 임수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흰색의 봉투를 받아들었다. 빠른 속도로 편지를 꺼내들어 훑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제일 빚을 만들고 싶지 않는 상대에게 빚을 만들어버렸군. 곤란해, 곤란해. 김명훈, 그 영악한 새끼가 그냥 넘길 리는 없을 테니.”
“천회를 한번 엮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새끼들이 켕길만한 짓거리 하겠냐? 그것도 김명훈 그 새끼가? 뭘로? 폭력? 매매?”
“드러그(drug-마약의 속어)라던가.”


남자의 말에 그는 피식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애새끼주제에 얼마나 철저한지 모르는거냐?”
“진실이든, 아니든, 그냥 엮어버리면 수사가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그는 약간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생각은 가상하다만 그것은 김명훈을 너무 손쉽게 본 얘기였다.


“쯔쯧. 너도 아직 어리군. 윤민이 네가 앞으로 이 조직을 이어받을 거라면 알아둬라. 확실하고 정확한 증거 없이 천회, 아니, 김명훈 그 자식을 철창에 집어넣으려면 도리어 네가 당한다는걸.”
“네?”


임수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윤민에게 의자에 앉도록 지시한 뒤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윤민은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 놈은 , 이윤화, 그 년을 너무 많이 닮았다.”
“이윤화...?”
“적 어도 우리나라에 나이 꽤나 있고, 이름 꽤나 알려진 놈 중에서 그 년 치맛자락에 휘감겨보지 않은 놈이 없을 만큼 유명한 계집이지. 정·재계는 물론이요, 연예계, 학계 등. 분야를 불문하고 그 계집 모르는 사내놈이 있을까 싶을 만큼.”
“그래봤자, 고작 창부계집 아닙니까?”


이상하다는 듯 되묻는 윤민에게 임수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그 래. 그냥 창부계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윤화, 그 갈보년이 얼마나 교활하고 잔악한 계집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잠자리에서 들은 이야기로 사람들을 좌지우지 하던 잔망스러운 년이, 그 외모만은 발군이라 사람을 끌어들이지. 팜프파탈이라하지? 그 계집이 그러했다. 사내들이 제 살 파먹는걸 알면서도 그 계집을 끊지를 못해 찾게 되는 요부. 그 계집이 나이를 먹고, 애를 낳은 뒤, 약에 취해도 그 미모가 시들기는커녕, 퇴폐적이고 허망해서 사내들이 그 년을 못 안아서 난리였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리 살았지. 완전히 약에 취해 죽기 직전까지도.”
“...”
“김명훈. 그 애새끼가, 그 계집년을 쏙 빼어 닮았지. 사람 유혹하는 모양새하며, 뒤에서 정보가지고 사람들 조종하는 꼴하며. 그 계집년이 남긴 정보, 다 그 놈이 가지고 있어. 지금 이윤화, 그 년 품에 안은 놈치고 김명훈 그 자식에게 세게 나갈 수 있을만한 사람, 높으신 분들 중에는 아무도 없을 꺼다. 우리가 그 놈 치려다가 되려 당해버리고 말테지.”


임수혁은 잠시 눈을 감고 이윤화를 생각했다. 화사한 미모와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던 색기. 그저 미소 짓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남자를 유혹하던 그 천부적인 재능. 나름대로 냉정하다 생각했던 자신마저 순간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넋을 잃을 만큼 놀랐었다. 그리고 그 재능을 천회의 그 애송이 놈도 지니고 있었다. 슬쩍 웃고,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사람을 매료시키는 그런 재능이.


“그 놈이 계집년이었으면, 더 힘들었겠지. 그런 계집, 이윤화, 그 하나로도 족하니까.”


제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민의 모습에도 임수혁의 얼굴은 좋아지질 않았다. 말은 그리 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김명훈은 계집은 아니었지만, 제 아비와 제 어미의 재능을 제대로 이어받은 놈이었다. 제 어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을 매료시키고, 제 아비처럼 다수의 사람들을 조종하는 카리스마. 그 모든 것을 갖춘 녀석. 그러지 않고서야 고작해야 4년 만에 천회를 이정도로 키워내질 못했을 터였다.
어떤 의미로는 임윤화나 제 아비인 김승조 이상의 위험인물. 그런 녀석에게 제 아들이자 no.2인 윤민이 맞설 수 있을지, 그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조직이 와해될 수도 있었다.


“그 새끼, 약점을 찾아봐. 천회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면 좋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뭐라도 좋아."
“네.”



---



“맛있어!”


아이스크림을 한입 크게 입에 넣은 명훈이 한없이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헤실거렸다.


“좋아요?”
“네!”


그 야말로 어린애마냥 웃는 모습에 윤택의 얼굴 또한 다정하게 변했다. 윤택 자신은 저렇게 단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명훈이 저리 웃는 모습을 보니 제 기분마저 좋아진 탓이었다. 꽤나 큰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좋아라 하는 모습을 보던 윤택이 갑자기 생각난듯 입을 열었다.


“아! 명훈씨. 혹시, 놀이공원 좋아해요?”
“?”
“우연히 티켓이 생겼는데, 같이 가실래요?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어때요?”
“저는 영광이죠.”


명훈의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윤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이제 수업이라 이만 일어날께요. 그럼 일요일에 뵈요.”
“네!”


윤택이 사라지자 명훈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승일과 광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갈꺼지?”
“네.”


광선의 대답에 안심한 듯 한 명훈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부끄러운 듯 웃었다. 설마하니 윤택이 먼저 약속을 제안할 줄은 몰랐던 터라 심장이 강하게 두근거렸다.


“아아. 기대된다.”










* 명훈이 엄마이름 이윤희->이윤화로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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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zero. 첫 만남








"으, 으악!"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넘어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지.

느 긋하니 그런 생각으로 보고 있었지만 넘어진 채 일어서지 못하는 그 모습이었다. 혹여 크게 다친게 아닌가 걱정스러워져 조심스레 다가가 손을 내미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남자. 내 걱정스런 질문에 어색한 듯 웃으며 답하는 그는 카페에서 종종 보이곤 하는 남자였다. 검은 와이셔츠에 검은색의 양복, 언제나 안경을 쓴 채 책을 읽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인.






"고맙습니다, 제 이름은 김명훈입니다."

"네. 저는 임윤택입니다."






꽤나 무서워보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눈꼬리를 휘며 웃는 모습이 생각보다 귀여웠다.













step one 인연








"윤택씨는 그럼 대학 조교수로군요. 대단하시네요."

"별말을요."






처 음 도와준 이후 종종 얘기하게 된 명훈은 생각보다 귀엽고, 생각보다 애교가 많았다. 굳게 다문 표정은 냉담한데도 웃는 모습은 귀여웠고, 그의 인상을 사납게 만드는 수염이 작은 키라던가 귀염성 있는 외모를 조금이라도 더 남자답게 보이려고 기르기 시작했다며 쑥스럽게 웃는 모습은 사랑스러웠다.

가만히 그가 수염이 없는 모습을 생각하면 공감이 가지 않는것도 아니었다. 수염이 없는 명훈의 모습을 시뮬레이션해본 결과 정말로 어려보이는 동안임에 틀림없었으니까. 지금도 가만히 살펴보면 어려보이는데, 수염이 없다면 진짜 학생으로 오인할테니까.






"윤택씨는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그, 그래요?"






자 신을 보며 웃는 명훈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윤택이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낯선 단어였다. 어렸을적부터 워낙에 어른스러웠고, 대학에서도 사람들을 챙기며 리드하는 스타일인탓에 깊은 관계를 맺은적이 거의 없었다. 그 탓에 보통 듣는 소리는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엄격하다, 무섭다, 어른스럽다, 이런 얘기들이었지 재미있다는 얘기는 거의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명훈씨도 굉장히 귀여운걸요."






자신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는 그 모습에 충동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말해버린 윤택은 아차 싶은 마음에 명훈을 바라봤지만 생각보다 나빠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수염을 길렀는데도 영 그런 소릴 많이 듣네요. 이상하네..."

"외모 때문만은 아니에요."






고개를 갸우뚱 젖히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명훈에게 말을 걸어버린 윤택. 그 말에 명훈이 눈을 반짝이며 윤택을 응시했다.



참, 이리 귀여운 행동을 하면서 자신이 모른다니.



윤택은 헛웃음을 지으며 명훈을 바라봤다.






"명훈씨, 행동이 굉장히 귀여운거 알아요?"

"그래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네요. 행동을 어찌할 수도 없고..."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명훈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윤택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졌던 명훈 또한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윤택씨, 왜..."

"명훈님."






명훈의 물음이 채 나오기도 전 말을 건네는 것은 검은 양복을 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명훈의 보디가드인 박광선, 그였다.






"광선아."

"이제,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이런, 윤택씨, 죄송합니다."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사과하는 명훈의 모습에 윤택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웃었다. 그 모습에 명훈 또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썬팅된 고급 자동차에 올라섰다.






"그럼 다음에 뵐께요."

"다음에뵈요, 명훈씨."






윤택은 점점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약간은 복잡하게 응시했다. 어째서인지, 굉장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 * *








"흐으-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다니, 무슨 일이야?"






방금 전까지의 생글생글 환하게 웃던 귀여운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마자 폭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이 숙인 명훈이 느른하게 물었다.

순진해보이던 눈매는 살짝 내리깔리고, 환한 미소를 머금었던 입가에 느긋하고 여유로운 비웃음이 걸린 것만으로도 명훈은 귀여운 남자는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색향을 품고 있었다.






"전환이 빠르시네요, 보스."

"뭐, 당연한거지. 자- 용건이나 말해봐."






느긋한 미소를 짓는 명훈의 모습에 광선은 절래절래 고개를 저으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그는 해야할 일을 잊지 않았다.






"독사파놈들이 움직였습니다."

"우리한테 덤비기엔 말도 안되는 놈들이?"

"뒤에 무적파. 그 놈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명훈이 이끄는 천회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무적파와 연을 가졌다고 덤비는 모양이었지만, 그런 조잡한 놈들에게 당할 천회가 아님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빽이 있다 그거로군. 철저히 무너뜨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여주라고. 알겠어?"






눈을 반짝이면서 명하는 명훈의 모습에 광선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 사안이 끝나자 명훈의 열굴에 요염한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나한테 관심 좀 가졌을까나?"

"너무 매달리시는 것 아닙니까?"

"웃기지마. 네 놈이 박승일에게 얼마나 울고불고 매달렸는지, 난 다 알고 있다는거 모르냐?"

"보, 보스!!!"






급격하게 당황하며 횡설수설하는 광선을 보며 명훈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임윤택. 처음 보는 순간부터 자신을 사로잡은 매력적인 남자.






"난- 한번 선택한 사냥감을 놓치진 않는다구. 기대해, 임윤택."






명훈의 눈이 요염하게 빛나며 밖을 응시했다.



김명훈(30세. 남)의 임윤택(34세. 남) 유혹하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 주인공 프로필


임윤택(34세. 남)

서울예대 연극영화과 조교수. 무려 32살에 조교수가 될만큼 유능하고 머리도 좋은 남자. 명훈의 눈에 우연하게 들어버린탓에 명훈이 현재 유혹중. 어느새 조금씩 넘어가고있음.



김명훈(30세. 남)

대 한민국 뒷세계 최대 조직인 천회의 보스. 카리스마성도 있고, 능력도 좋다. 매력적인 외모에 굉장히 색기 넘치는 보스. 임윤택에게 반해 윤택앞에서는 내숭 100단. 순진한 척, 귀여운 척, 등등.. 윤택앞에서는 거의 이중인격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있다.



박승일(33세. 남)

서울예대 앞 작은 카페 겸 바, God Voice의 오너. 원래는 잘나가던 검사. 하지만, 재수없게도 박광선의 눈에 들어 연인이 된 후 현재는 카페 운영중. 천회의 변호사 역활도 같이 하고있다.



박광선(28세. 남)

천회의 행동대장이자 보스인 명훈의 오른팔. 윤택은 경호원이라고 알고있다. 검사인 박승일이게 반해 오랜기간 쫓아다닌끝에 결국 연인으로서 승낙을 받아낸 집념의 사나이.






step two. Cafe owner 박승일






과연 언제까지 버틸까?



승 일은 제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전공서적을 뒤적이는 남자, 임윤택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윤택이 넘어가지 않는다는 가정은 전혀 없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김명훈이 움직여서 실패한 경우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탓이었다. 고작해야 20대 초반의 나이로 보스가 되어서는 5년 만에 대한민국의 뒷세계를 점령할 만큼 명훈은 영리하고 또 잔혹했다. 게다가 사람을 매혹시키는 카리스마마저 갖춘 존재. 만약 명훈이 뒷세계가 아니라 앞쪽으로 나왔어도 성공했을 거라, 승일은 그리 생각했다. 그런 인물이 혼신을 다해 유혹하고 있는데 넘어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네? 아뇨. 별거 아닙니다.”






윤택의 물음에 잠시 당황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넘긴 승일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박광선, 이 자식은 어째 연락이 없는 거람.






♬swing~ swing~ swing my baby♩♪




"여보세요?"

「형! 저 조금 늦어질 것 같은데, 어쩌죠?」

“또 왜?!”






고작해야 전화해서 하는 소리가 안부도 아니라 제 용건이란 말이지? 싸늘해진 승일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 광선이 전화너머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 일이 생겨서.. 혀엉~ 빨리 갈게요.」

“9시. 이 이후엔 집에 올 생각마라.”

「에? 형, 형!!!」






급격하게 당황하며 소리지르는 광선의 목소리에도 승일은 냉정하게 통화종료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느긋하게 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런 승일을 보며 윤택이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의외...시네요.”

“네?”

“왠지, 조금 냉정해 보이는 인상이라.”






윤 택의 말에 승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체 차가운 인상인데다가 검사로 일하면서 조금 더 그런 분위기가 붙은 터라 아직 채 떨쳐내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2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 검찰청에서 평검사치곤 꽤나 대우받던 자신이 아니던가. 자신에게 울며불며 매달리며 대쉬하던 광선이 아니었으면 아마 아직도 검사로서 있을 터였다.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전, 첫인상에 영 재주가 없는가봐요. 승일씨도 그렇고, 명훈씨도 그렇고.”

“네?”






윤택의 입에서 나온 명훈이라는 이름에 승일은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이 사람이 보는 김명훈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랬기에 승일은 설거지를 멈추고 커피 두 잔을 가져가 윤택의 앞에 앉았다.






“윤택씨가 보기에 명훈이는 어떤 사람이죠?”

“꽤나 친밀하시네요?”

“워낙에 단골이니까요. 자주 찾아오고."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납득하는 윤택의 모습을 보며 승일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거 아무래도 이 임윤택이라는 남자가 김명훈의 손아귀에 떨어질 날은 멀지 않아 보였다.






“명훈씨는... 귀엽죠. 순진하고, 착실하고, 상냥하고.”

“컥, 켈록- 켈록-”

“괜찮으세요?!!”

“아.....네, 윤택씨가 보기에 명훈이는.... 그, 그렇군요.;;”






윤택의 말에 순간 커피를 뿜어낼 뻔한 승일이었지만 간신히 참아내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례가 걸려 콜록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세 상에. 무려 천회의 보스. 그 오만하고, 도도하고, 매력적이며, 잔인한데다, 제멋대로인 남자에게 귀엽다? 순진하다?? 착실하고 상냥하다??? 어느 정도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명훈의 본성을 아는 승일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얘기였다.






'광선이, 그 녀석은 귀여운 거였어. 그래... 울며 매달리는 쪽이 낫지.’





「“혀엉- 나 형이 저~~엉말 좋아요.”

“얌마! 너 내 직업이 검산거 모르겠냐? 세상에 내 검사에게 매달리는 조폭새낀 처음 본다. 그것도 너 천회의 행동대장이라면서?”

“그게 뭐가 어때서여.”

“이 녀석, 막무가낼세. 얌마, 검사인 내가 조폭새끼인 네 놈이랑 어울릴 것 같다 생각하는 거냐?”

“나랑 사겨줘요. 안 그럼- 나- 안 나갈-거에요.”

“당장 나가!”

“싫어요- 흐어어엉-!!”」







완전히 술에 절은채 집에 찾아와서는 펑펑 울면서 고백하던 광선을 생각해낸 승일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광선이가 조금 늦게 오더라도 용서해야겠다. 암, 김명훈에 비하자면 광선이 놈은 순진하고 착한 강아지새끼나 마찬가지지. 그럼 그럼.




승일은 그리 생각하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짓는 입 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승일을 윤택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So here I am with open arms~♪♩



『박승일』




옆에서 승일이라는 이름에 눈을 반짝이며 휴대폰만 응시하는 광선을 무시한 채 잠시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을 응시하던 명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웬일이야, 승일형?"

「아주 재미난 소릴 들어서.」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차마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킥킥거리는 승일의 목소리에 명훈의 눈동자가 의문을 띄었다.






「세상에. 너에게 귀엽고, 순진하고, 착실하고, 상냥하다더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아 무리 생각해봐도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평가에 느른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던 명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매력적이다, 유혹적이다, 퇴폐적이다, 제멋대로 성격 더러운 녀석이다. 라는 평가야 꽤나 들었고, 그 평가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명훈이었지만 지금 승일이 하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금시초문.



제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할 만큼 대담한 놈은 내가 다 반쯤 죽여 놨었는데?



그런 고민을 하는 명훈을 알 듯 전화 건너편 승일의 목소리는 밝았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

"당연하잖아."

「임윤택. 우리 보스님, 임윤택 그 사람에겐 이미지메이킹 성공했네. 이거, 축하한다고 해야 하나?」






승일의 입에서 나온 단 하나의 이름에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러보면 윤택 앞에서야 그런 모습을 위장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라주는 모습이라니. 생각보다 순진한 건가?






「김명훈, 임윤택에게 잘해야겠더라. 아, 그리고 광선이에게 오늘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전해줘.」

"아아-"






그 와 동시에 끊어진 전화기에 간절히 전화를 바라보던 광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철저히 승일에게 잡혀 사는 광선이 심기를 거슬러버린 승일에게 전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명훈이 전화를 바꿔주는 것을 기대한 모양이지만, 불행히도 명훈은 그리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이미지메이킹이 잘된 건가? 너무 그런 이미지면 곤란한데 말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고민에 빠진 명훈이 손가락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모든 일이 언제나 제 뜻대로 풀린 탓에 세상에 어려운 것 없다 자신하던 명훈에게 정말 임윤택이라는 남자는 모든 면에서 제 예상을 뛰어넘는 상대였다.






"뭐,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말야. 아, 박광선. 승일형이 너 조금 늦게 들어와도 된다더라."

"진짜요?!"






명훈의 한마디에 바로 밝아지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늘상 승일이 말하는 귀여운 박광선이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뒤에서 바쁘게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는 환각이라니.






"어찌된 게 넌 그리 승일형한테 잡혀 사냐?"

"상관없잖아요. 내가 좋아해서 매달렸는데. 제가 문제가 아니라, 제 눈에는 보스도 그럴 것 같거든요."

"웃기는 소리."






뚱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는 광선을 보며 명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런 애새끼 같은 놈이 조직 내에서는 얼음 같다느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니 해대며 두려워하는 꼴이 영 우스웠다.






'아무래도 인간관계를 재정립해야할 필요성이 있어. 저런 싸이코같은 놈이 어딜 봐서... 아이고.'






광선이나 승일이 알았다면 분명 반발했을 생각을 하는 명훈은 결코 그 범주에 자신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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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묘한 17금 주의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철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제 품속에 있는 단도를 꺼내들었다. 시퍼런 칼날의 빛이 시리도록 눈을 파고들었다. 지독하게 비를 맞은 탓에 정신을 잃은 명훈의 몸이 뜨거웠다.






“하아.. 하아....”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 떨리는 손을 들어 조심히 볼에 손을 가져갔다. 성인임에도 보드라운 살결이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렸다.



내가 널 어찌 버리겠니. 이건, 버리는 게 아니다. 그저 내 목숨보다 널 더 소중히 여긴 것이야. 그러니 명훈아. 너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라. 내게 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윤택은 조심스레 명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안녕, 명훈아. 내 하나뿐인 정인아.











반란 외전 Side - Sad











따스한 봄의 햇살.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간신히 정신이 든 명훈이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토록 그립고 그립던 집이었다.






“정신이 드니, 명훈아?”

“서방님!! 제가 보이십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보인 것은 소중한 어머니와 제 지어미였다. 자신을 안고 눈물을 터뜨리는 부인과 계속해서 머리와 얼굴만 쓰다듬는 제 어미를 보고 있음에도 어딘가 마치 꿈같다. 그리 생각했다.


늦둥이인데다가 워낙에 몸이 약했던 터라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랐더랬다. 언제나 몸이 약한 막내아들을 귀이 여기던 어머니였지만, 어째서 저리 놀라고 기뻐하는지, 그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깨어나 다행이로구나.”

“아.. 버지..”






형편없이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명훈이 더 당황했다. 당최 어찌된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여 죽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크게 앓았느니라. 하긴, 그럴 만도하지. 반란군에게 잡혀서 고생한데다가 체력도 약한 네가 산에 끌려가질 않나, 비를 맞아서 사경에 헤매는 상태인 널 인질로 삼을 만큼 지독한 반란분자였더구나.”

“관군이 널 구해 와서도 일주일이 넘게 사경을 헤맸단다. 정말,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깨어난 게야.”






아버지와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명훈은 어딘가 어긋나 있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기억은 윤택과 함께 산길을 헤매다가 비를 만나 동굴로 들어간 것 까지였다. 그런데 반란군에게 인질로 잡혔다?






“그 임윤택이라는 자. 지독하더구나. 네 어릴 적의 동무이면서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쯧쯧."






그제서야 윤택에게 생각이 미친 명훈이 급히 몸을 일으키려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온몸에 퍼지는 지독한 고통.






“아직 몸이 낫지 않았는데 조심해야지!! 좀 더 누워있으렴.”

“반.. 란군은... 어찌되었습니까?”






힘겨운 명훈의 물음에 아버지인 김대감의 표정에서 안쓰러움과 분노가 스쳐지나갔다.






“주 모자인 홍경래와 우군칙, 그리고 널 납치한 임윤택은 효수(梟首)되었느니라. 살아있었다면 능지처참 후 그리되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죽어서 한성에 들어온 터라 그저 효수의 형벌만 받았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대역 죄인을 그리 쉬이 죽이다니.”






그 말에 명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날 버리고 갔으면 살 수 있었을 것을 왜.. 그런 것이오. 나 같은 놈 죽게 내버려두질 않고 왜....






“아직 몸이 채 낫질 않았는데 너무 심란한 얘기만 했구나. 쉬거라. 부인, 아가. 나가자꾸나.”

“네, 대감. 우리 아들, 좀 쉬거라.”

“서방님, 잠시 후 오겠습니다.”






그들이 나가자 명훈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저를 보며 환히 웃던 윤택이 생각나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저 제 몸을 탐하고, 제 신뢰를 져버렸고, 주상께 반역하는 대죄를 저지른 이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그리웠다. 절 제 품에 묶어 날아가지 못하도록 길들이고선 사라져버린 자.






“내게 어쩌란 것이오, 대체 어쩌라고...”






가려진 명훈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








간 신히 깨어난 명훈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지 벌써 한 달이 흘렀건만 명훈은 집밖으로 나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방에서 서책을 읽고 가끔 마당에 나와 넋을 잃은 듯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볼 뿐. 그런 명훈의 모습에 다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명훈은 어딘가 멍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이리 의욕이 없이 행동한 적은 없었기에 다들 당황했으나 워낙에 고생을 한터라 그런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님!!”

“현택아.”






그 런 명훈을 웃게 만드는 유일한 이는 이제 4살 난 명훈의 아들, 현택이었다. 제게 도도도 달려오는 어린 아이는 제법 무거워 가는 체격의 명훈에게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그는 아이의 따뜻한 온기가 그리웠다. 아이의 이 온기가 이미 사라져버린 이를 생각나게 만들었다.






“현택아! 너 아버님이 힘드실 터이니 그리 달라붙지 말라,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아버님이 좋은걸요.”






뚱한 표정으로 입을 내미는 모습이, 당돌한 그 어조가, 아이의 모든 것이 그리운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그가 어릴 적 저러했다.



아이는 제 핏줄임에도 놀라울 만큼 그와 닮아있었다.






“이 못난 아비가 좋으냐?”

“당연하지요! 전 세상에서 아버님이 제~일로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 너 이상으로 소중한 이가 없음이다. 난 네가 제일 좋다, 명훈아.」






제일 좋다하고 어찌 그리 떠나신거요?




아마 제 마음 속에 다시는 누군가가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평생토록 그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죽음이 편타 생각할 만큼 괴로워하면서 지내겠지.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에게 주지 못한 이 마음, 그대를 대신해 이 아이에게만 온전히 쏟을 것이다. 그것은 먼저 떠난 그대의 잘못이니 뭐라 하지 마시오.


명훈은 힘주어 아이를 껴안았다. 그것은 바른 것도, 그 무엇도 아닐 테지만, 내게 남은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나도, 택이, 네가 제일 좋다.”


  

  

===



“어쩌면, 네가 가진 것을 다 버려야할지도 몰라.”






내가 가진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아비의 권세였고, 나는 그저 그 권세의 혜택을 받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지독하게 몸이 약해 어릴 적부터 날 사랑해주던 부모님과 형제자매, 그리고 이 못난 놈과 혼인한 부인과 이제 4살이 되었을 어린 아들을 생각하면 괴로웠지만, 사내의 손을 놓고 싶지가 않았다.



미친 게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생각을 할까? 내 자신의 잔혹성이 무섭고, 이 욕망이 두렵다.





하지만, 사내의 온기를 놓치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윤택명훈] 반란(叛亂) 外傳 Side - Happy











바 로 지척까지 쫓아온 군관을 따돌리는 것은 엄청난 인내와 체력싸움이었다. 청나라의 국경만 넘어간다면 따라오지 못할 터. 게다가 열이 펄펄 끓는 명훈이가 오랜 시간 버틸 리가 만무했다. 몇 번이나 포기할까 생각도 했으나 그때마다 제 손을 부여잡는 명훈의 온기가 없었다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 질긴 추적을 뿌리치고 간신히 청의 국경을 넘었을 때 명훈이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한달이 넘게 의원에서 몇 번의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눈을 뜬 명훈이는 완전히 초췌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싹 메마른 입술로 간신히 달싹거리며 하는 말은 윤택의 눈물을 뽑아내기에 충분했다.






“왜, 그런, 표정인거야, 성은...”

“원망하지.. 않는 거냐?”

“내가, 선택, 했으니까.”






명훈은 그런 이였다. 제 선택에 신념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런 단호한 녀석.






“행복하자, 명훈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우릴 살려준 다른 사람들 몫만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명훈의 모습을 보며 윤택은 명훈을 꽉 껴안았다. 내, 너의 이 온기를 놓치지 않을거다.








* * *








1820년 청나라 심양






"아니, 너무하지 않소!! 이것이 아무리 조선에서 건너온 것이라 하나 어찌 이리 비싸단 말이오."

"싫으면 마시오. 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워낙에 자네가 단골이라 남겨둔 것인데 어찌 그런 소린가?"






상인의 말에 조선옷을 입은 사내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결국 상당량의 가경통보를 건네고 받은 책은 그리 훌륭하거나 좋은 책은 아니었지만, 보고 기뻐할 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슬 슬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하늘의 모습에 저를 걱정할 정인의 생각에 조금 걸음이 조급해졌다. 가볍게 식재료 몇 가지를 함께 산 그가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꽤나 한적한 시골마을 한켠의 작은 집이었다. 한 쪽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그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다녀왔다, 명훈아"

"아, 어서오시오, 형."






환히 웃으며 마중하는 명훈의 모습에 윤택은 환히 웃으며 명훈에게 다가갔다.






"서책이랑 가벼운 찬거리들을 사왔다."

"내 하면 된 다해도 그리 쓸데없이 부지런도하네."






타 박하듯 말하는 명훈이지만 실제 속내가 그렇지 않음을 아는 윤택은 식재료를 부엌에 넣어 둔 후 서책을 한쪽에 놔두고선 여전히 빨래에 신경 쓰는 명훈의 뒤로 다가가 그 작은 몸을 쏙 안았다. 따뜻하고 포근한 내음이 윤택의 기분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남새스레 왜 그래?"

"네가 좋아서 그런다."






퉁명스런 명훈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윤택을 흘겨보는 명훈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너무도 귀여워, 윤택은 그저 웃었다. 가볍게 볼에 입을 맞추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1각(1각=15분정도)후면 벌써 해시(21시~23시)다. 어두워졌으니, 이제 방으로 들어가자."






윤택의 그 은근한 요구에 명훈의 얼굴이 완전히 붉어진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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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품속에서 흐트러진 채 깊은 잠에 빠진 명훈의 모습에 윤택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품에 안았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제 흔적을 몸에 남긴 채 잠든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윤택은 고개를 숙여 명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가져갔다.







"사랑한다, 명훈아."






잠든 명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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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묘한 19금 주의






제 몸통에 박힌 칼을 보며 든 생각이 안도라는 것은 우스웠다. 허나, 자신은 결코 사내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형..님.”






아직은 어린티가 역력한 명훈의 낮게 쉰 목소리에 피를 뒤집어쓴 사내가 잠시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내는 참으로 강한이였다. 그랬기에 동경했고, 언제나 그 모습을 쫓았다. 그러나 운명이란 이 얼마나 우스운지.






“... 참으로 멍청하지 않소. 이리될것을 알았다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을.”
“운명이 인간의 손으로 바뀐다더냐? 만약이라는 가정은 필요없는 것이다.”



담담한 사내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점점 시야가 흐려졌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다면 좋았을것을.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맴돌며 의식을 잃었다.



[윤택명훈] 반란(叛亂) 上
by. 휘나인




윤택과 명훈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은 산음현(山陰縣 : 현재의 경상남도 산청군)이라는 산세가 아름다운 고을이었다.
과 거 소론이었던 윤택의 가문은 아버지인 임진사(進士:진사과에 합격한 사람에게 주던 칭호)의 대에 와서 거의 이름만 남은 양반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평민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산음현을 다스리는 현감(縣監:종6품의 지방관)은 보기드물게 어질고 좋은 인물이었다. 덕택에 고을은 평안했고, 세를 잃은지 오래인 윤택의 집안 또한 산음현에서는 그럭저럭 양반행세를 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윤택이 제대로 된 양반이라 할만한 명훈을 본것은 제 나이 7, 명훈의 나이 5살 때였다. 뽀얀 피부와 귀티나는 얼굴, 사람을 부리는것에 익숙한 아이는 부지불식간에 윤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을에서 가장 세(勢)가 높은 기왓집에 들어간 아이를 다시 본것은 아이가 내려온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현 홍문관(弘文館: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부제학(副提學:조선시대에 홍문관에 둔 정3품 관직)이신 김승환영감의 자제인 명훈이라 한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이리도 무례한가?"



예쁘장한 외모의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귀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 어조는 엄격한 예법으로 딱딱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 아이이 연령에 비추자면 너무나 귀여운터라 윤택은 저도 모르게 부드럽게 웃었다.



" 나는 임윤택이라하네. 부친은 진사이시며, 조부님은 과거 장례원(掌隷院:조선시대 노비의 부적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정3품 관청)의 사의(司議노비의 적과 소송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정오품의 벼슬)를 지내신 적이 있는 가문일세."
"그렇다면 제가 실례를 했군요. 이 산음현이 워낙에 작은 곳이라 이리 학식이 깊고, 그 역사가 긴 가문이 있을줄은 몰랐습니다. 편히 명훈이라 불러주십시오."
"나도 윤택으로 좋네."


환히 웃는 명훈의 얼굴을 보는순간 심장이 두근- 뛰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 한순간뿐인지라 그저 잘못 생각한것이려니. 그리 넘겼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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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한양으로 돌아간단말이지.."
"네, 성님. 아마 한양으로 돌아가면 내 태중혼약자(胎中婚約者)인 동부승지(同副承旨:조선시대 승정원에 속한 정3품 관직) 영감의 둘째 여식과 백년가약(百年佳約)을 맺게 될겁니다."
"그, 그런가. 축하하네, 아우."



순간 저릿하게 아파오는 가슴의 고통에 입술을 깨문 윤택이 간신히 축하의 말을 건네자 명훈이 흐리게 웃었다.



"성님이야말로, 어서 혼인을 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벌써 나이가 18이십니다. 관례를 치룬지가 이미 옛날이거늘 언제까지 홀로 계실 참입니까?"
"언젠가 연이 닿으면 이뤄지겠지. 그리 급할것없다 생각하네."


아 무렇지않게 답한 윤택이었지만, 차마 제 심정을 어찌 말할 수 있을까? 명훈과 만난지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 느꼈던 심장의 두근거림이 기실 명훈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은지도 여러해. 날이 가면 갈수록, 해가 가면 갈수록 더해만가는 제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제 감정으로 명훈을 상처입히지 않기 위해, 미칠것만 같은 제 마음을 누르고 그저 좋은 형으로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겨웠던가. 결코 명훈은 알지못할 제 칙칙하고 어두운 감정을 명훈에게 쏟아붓고 싶은 그 충동. 당장이라도 명훈을 범하고 싶은 그 더러운 욕망.
명훈을 잊어보기위해 홍루에도 찾아가봤으며, 다른 여인네를 사랑해보기위해 노력한적도 있었다. 허나 결국 그것은 제 자신이 얼마나 명훈을 좋아하고 있는지를 각인시키는 것. 그 외의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 어떤 여인을 안아도, 절세의 미인을 바라봐도 보이는 것은 그저 명훈의 웃는 얼굴. 그 뿐이었으니까.


"성님. 좋은 연, 만나시길 빌겠습니다."



내게, 너 이상의 연은 없다. 내게 각인된 이름은 김명훈, 그 석자뿐이며, 내가 죽어도 사랑할 사람은 김명훈, 너 하나뿐일테니.



"조심해서가라, 명훈아."



아주 어릴적에 부르던 호칭으로, 어릴적처럼 얘기하자 명훈의 얼굴이 약간 발그레한 빛을 띄었다. 쑥스러운듯 헤실 웃은 명훈이 윤택의 품에 안겼다.



"몸 조심하세요, 윤택형. 다시 연이 닿아 만나면 좋겠어요."




격식어린 말투가 아닌 그저 편한 어투로 말하는 명훈의 목소리가 윤택을 흔들었다. 널 놓고싶지않다. 허나,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 뒤돌아서 걸어가는 명훈의 뒷모습을 보며 윤택은 주먹을 쥐었다.
윤 택은 명훈과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현 판윤(判尹:한성부의 정2품 관직)인 김대감의 자제로, 그 가문은 현 주상전하의 비를 배출한 명가중의 명가. 반대로 자신은 고작해야 먹고살기 급급한- 양반의 이름만 남은 몰락한 가문의 후계. 명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물러서야할 입장이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명훈의 뒷모습을 보며 윤택은 눈을 빛냈다.


명훈아. 내 이번은 놓아주지만, 다시는 널 놓지 않을거다. 다시 만난 순간엔 내 널 나의 것으로 만들거다. 그러니, 도망가라. 날 만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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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택은 대과에 합격할 수 없었다. 언제나 가문이 문제가 되어 떨어지길 수차례. 처음에야 능력이 부족하다 생각했지만, 저보다 훨씬 못한 이들이 가문의 힘으로 합격하는것을 보고서도 능력을 탓할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이던가? 국가의 인재를 뽑는것인데, 그조차도 가문의 힘이 없으면 합격조차 할 수 없다는것은.
이제나 저제나 윤택이 과거에 합격하기만을 바라던 늙은 어미마저 세상을 달리하자 윤택은 과거를 포기한 채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윤택이 만난이가 홍경래였다. 윤택자신이 지닌 조선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교묘한 언변으로 동조하는 사내. 어느순간 윤택은 그에게 매료된 자신을 알았다.



"임호원(浩遠:광대하고 멀다. 윤택의 호)은 이리 시간만 보낼참이요?"
"하하. 내 아무 능력도 지니지않은 그저 한량일 뿐이외다."
"임호원. 나와 같이 세상을 바꾸지 않겠소? 호원의 지식과 능력이 이토록 빼어나거늘, 어찌 그저 한량으로서 시간만 보내려하는게요?"




홍경래의 말에 그저 웃음으로 넘긴 윤택이었지만, 내심 자신을 알아주는 사내가 점점 맘에 들었다. 자신만만하고, 영리하고, 재기가 넘치는. 결국 윤택은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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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천현(泰川縣:현재 평안북도 태천군)의 현감은 어떤자인가?"
"상당히 평판이 좋습니다. 중앙의 대감의 자제인데 그 능력이 뛰어나나 워낙에 대쪽같은자라 어쩔수 없이 태천의 현감으로 부임해왔다 하더군요. 현재 2년째 재직중인데 민초들의 사정도 잘봐주는 좋은 현감이라 합니다."
"그런자를 치는것은 곤란하긴하지만, 태천을 버리고 갈수는 없지. 임호원. 그대가 태천으로 가주겠소? 되도록이면 현감을 살리는쪽으로."


한참이나 진행되던 회의를 가만히 듣고있던 윤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그래도 어떤 자이기에 그토록 평판이 좋은것인지 궁금해졌던 탓이었다.


"알겠소, 홍장군. 난 나가보도록 하지."
"더 듣지않을거요?"
"적이 정해진바. 더 들을 필요성이 있는거요?"



그 와 동시에 윤택이 나가버리자 홍경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능력과 재능, 실력 모두 겸비했지만, 동시에 윤택은 너무나 자유로운 자였다. 언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나가버릴것같은 그런 바람같은 자. 과연 저 남자를 잡아둘만한 존재가 있을것인가? 윤택의 능력과 실력을 알면 알수록 불안해지는탓에 홍경래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더할까요?"
"아아."
"현 현감의 이름은 김명훈. 호는 천평(天平). 현재 28살로 우찬성(右贊成:조선시대 의정부의 종일품 관직)의 셋째 자제입니다. 놀랄만큼 영리하고 지혜로우며, 자비로운자이되, 다만 그런 명문 세도가의 자제치곤 상당히 강직하고 원리원칙적인 인물입니다. 덕분에 조정에 적이 많습니다. 워낙에 그 지닌바 능력이 뛰어나고 집안도 명문가이니만큼 태천에 현감으로 부임해왔습니다."
"만만한자가 아니로군. 호원이 고생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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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천을 함락시키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을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껏 자신들의 위세에 겁먹지않은 자가 없었으며, 실제 그리 뛰어난 자들도 없었다. 그랬기에 가볍게 홍경래의 부탁에 움직인것이었고. 하지만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윤택은 어떻게해서든 이곳으로 오지 않고싶었다.



"윤택...형?"
"누구...?! 김명훈?"
"어찌 성이 그곳에 계시는거요?!"


가 늘게 떨리는 명훈의 물음에 윤택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네가 그곳에 있느냐? 그토록 그리워하고 바라던 이가 눈앞에 있음에도 마냥 기뻐할 수 없음에 윤택은 괴로웠다. 저를 보고 격히 흔들리는 명훈의 모습이 안쓰러워 제 상황을 잊을뻔하였다. 허나 명훈의 주위를 감싸고있는 관군의 모습은 그와 명훈이 전혀 다른 길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찌하여 난, 홍장군을 만났던 것이며, 왜 너는 이 곳 태천의 현감인게냐? 헤어진지 오랜시간이 지났거늘 명훈은 언제나 윤택이 꿈꿔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더 성인의 분위기를 지녔지만, 여전히 윤택의 눈에는 작고 연약하고 착하던 아이와 겹쳐보였다.


"설마, 성이.. 반란군... 이요?"
"그래."



단 한마디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리 무거울까? 윤택은 차마 명훈을 응시할 수 없었다.
내 너와의 정은 중하나, 내 의지와 생각으로 여기 서있으니, 필하다면 내 너와 맞설것이다.
그런 윤택의 단호한 의지를 읽은 것인지 명훈은 덜덜 떨면서도 강한 목소리로 주변의 관군을 바라보았다.



"저들이, 반란군이다. 주상전하께 해가 되는 이들이니라. 용납치말거라."
"저 고을을 함락시키는것이 우리의 일이다. 돌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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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명훈의 얇은 피부를 찢고 박혀들어간 것은 분명 윤택 자신의 검이었다. 마지막 순간 명훈은 윤택을 노리던 제 검을 멈춰버렸다.


"왜, 그랬느냐? 난 네 말대로 반란군이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피에 젖은 명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바닥에 쏟아지는 저 붉은 것은 명훈의 생명이었다.

보낼 수 없었다. 내가 어찌 나의 손으로 널 보낼 수 있겠느냐?

윤택이 급박하게 검을 뽑아내고 울컥 쏟아지는 피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난을 일으키며 지금껏 지독하게도 보아온 피가 이토록 두려운 것이었는지, 윤택은 처음으로 깨달은 기분이었다.




“...형..님.”



명훈의 낮게 쉰 목소리에서는 점점 힘이 없어지고 있었다.




“... 참으로 멍청하지 않소. 이리될것을 알았다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을.”
“운명이 인간의 손으로 바뀐다더냐? 만약이라는 가정은 필요없는 것이다.”



냉담하게 답하였지만, 윤택은 지금 급박한 심정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정인(情人)을 죽일수는 없었다. 간신히 어렵게만난 연인(戀人)이었다.



명훈의 맑았던 눈동자가 점점 흐려지며 느리게 윤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치게 피를 쏟아낸탓에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




거의 들리지않는 희미한 목소리.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 윤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내지않는다. 내가 이리 간신히 손에 넣은 널 보낼 줄 아느냐?


그런 윤택을 아는지모르는지, 명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있을 뿐이었다.







+ + +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다.


딱 딱한 사람이지만 나에게만은 따스해지는것이 기뻤고, 내가 한양으로 떠나는게 되었을땐 아쉽다 생각했고, 한양에서는 미칠듯한 그리움에 잠못이뤘다. 그것은 혼례식을 치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부모님도, 내 지어미된 여자도, 심지어 나의 피를 이어받은 어린 아들도 날 채우지는 못했다. 원체 강직한 성격탓에 좌천되다싶이하여 태천현의 현감으로 부임했을땐,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날 지아비랍시고 믿고 따르는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어린 아들에 대한 죄책감. 그 괴로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이곳에서 차라리 마음정리를 하자. 다시 돌아갔을때는 한 여자의 지아비로써, 한 아이의 아비로써 떳떳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하자. 그리 생각했다. 허나, 나의 눈에 그가 비친 순간 어이없게도 깨달아버렸다.




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얼마의 시간이 지나도, 저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것임을.




[윤택명훈] 반란(叛亂) 中



by. 휘나인




작 지만 깨끗한 방. 부드러운 요위에는 파리한 안색의 어딘가 어린 이미지를 지닌 남자가 누워있었다. 창백하고 메마른 시체같은 모습이지만 가늘게 이어지는 얕은 숨이 남자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한명의 사내가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태천현감을 사로잡은이후 윤택이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홍경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남자만 바라보는 사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임호원도 참.. 대체 몇일째 지극정성인거요. 벌써 열흘도 넘었소이다."
"깨어나는 모습, 내가 봐야만하네. 내가 이 손으로 이 아일, 이리 만들줄은 몰랐어."




아이.

윤 택의 말을 듣던 홍경래가 작게 한번 그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누가봐도 시커먼 사내놈이거늘 사내의 눈에는 마냥 어린아이로만 보이는것 같아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타인에게 냉담하던 사내를 흔드는 이가 같은 남자라는 것은 어찌된것인지.
아무리 경직된 유교관념을 지녔다 할지라도, 사내들끼리 모인 집단에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윤택의 모습은 예상이상이었다. 저것은 마치 연모라기보단, 열렬한 숭배와 비슷했다.




"현 우찬성대감의 자제분과 어찌 아시는게요?"



단 한번도 제 과거를 털어놓지않던 윤택이었기에 기대도 않고 물었건만, 의외로 깊은 한숨과 함께 윤택이 입을 열었다.



" 내 7살때 처음 산음현에서 만났지. 햇볕에 그슬린 민초들과 비슷한 삶을 살던 나에게 처음으로 양반이란게, 사회의 지배계층이라는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었다할까. 뽀얀 얼굴과 귀여운 목소리로 어울리지않게 위엄어린 말투를 하는 어린아이. 고작해야 5살의 꼬마면서 타인을 부리는데 익숙한. 누가봐도 정진정명한 양반가의 금지옥엽. 위의 형제들과 나이차이가 많아 유난히 귀여움받고 자랐던터라, 귀한태가 나는 그런 존재였네, 명훈이는."



말을 마친 윤택이 똑바른 시선으로 홍경래를 응시했다.



"내가 이 아일, 명훈이를 좋아함을 이미 알고있겠지."
"눈에 보이니 어찌 모르겠소. 그런데 왠지, 연모보단 숭배에 가까워보이오."
" 홍장군의 눈에 그리 비친다면 사실이겠지. 내가 언제부터 명훈일 연모하게 된것인지는 나도 모르네. 예쁘다 생각했고, 지켜주고 싶다 그리 생각은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명훈이를 보면 심장이 뛰더군. 헤어지고 싶지 않았네. 허나 아이의 장래, 이 사회적 위치. 그 모든것을 생각해 딱 한 번만 놓아주자, 그리 생각했지."



윤택이 손을 들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명훈의 볼을 쓰다듬었다. 마치 깨질것같은 공예품을 다루듯이.



"두 번 다신, 놓치지않네. 놓아줬는데 내 손으로 날아들어왔으니... 죽음 같은 것에게 뺏길줄아는가."



조 심스럽지만, 한없이 광기어린 윤택의 모습에 홍경래는 왠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윤택은 무서운 사내였다. 평상시에 워낙에 허허실실 웃고 온화하게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원한 것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손에 넣는 타입이었다. 지금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탓인지는 몰라도 명훈은 굉장히 연약하고 여린 이미지가 있는만큼, 윤택이 명훈에게 가지는 감정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것은 아니자만, 같은 성별의 존재인만큼 윤택에게 걸린 저 남자에 대해 약간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허나, 이 이상 명훈과 윤택의 관계에 끼어드는것은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홍경래는 그저 외면을 택하기로했다.



"적당히 하시게나, 호원. 자네의 말을 들어보자면 섬세한 이인것같은데, 너무 몰아붙이면 서로간에 상처만 될터이니."
"알고있네."




---



깜박-


영원히 뜨일것같지않던 명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흐릿한 시야,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지독한 고통, 엷은 약초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흐으...."
"...명훈아? 깨어난거냐?!!"




어 찌된것인지 움직여보려던 명훈이 들려온 목소리에 굳어졌다. 그립던 목소리를 듣는순간 명훈은 모든 생각을 멈췄다. 그때 반란군이 된 윤택을 보고 차마 그를 죽일 수 없었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그의 칼을 맞았었다. 온몸으로 퍼지던 둔중한 고통에, 일그러진 윤택의 얼굴에 왠지 허무하여 눈을 감았는데 어째서 지금 윤택의 목소리가 들리는것일까?
하지만 곧이어 보인 얼굴에 명훈은 차마 그를 응시할 수 없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네가 죽을까 걱정했다."
"...왜?"



왜 날 살린게요?
차마 입밖으로 나오지 못할 말을 삼키며 명훈은 윤택을 바라봤다. 그것을 알았음에도 아무 대답없이 명훈을 응시하던 윤택이 몸을 일으켰다.



"네 먹을것을 조금 가져오마."




---




명훈이 깨어난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둘의 사이는 변화가 없었다. 아무런 대답없이 그저 헌신적으로 명훈을 돌보는 윤택과 혼란해하면서도 그런 윤택에게 아무런 물음없이 갇현 명훈. 그런 관계를 깨트린것은 명훈이었다.



"뭘 원하는건지 말해보시오."
"원하는것?"
"양반의 긍지마저 다 버리고, 적대적인 관계의 날, 왜 이리 살려두었소? 뭔가 원하는것이 있을것 아닙니까?"



그저 넘어가, 모른척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명훈은 지나치게 강직했다. 그런 명훈이었기에 이런 애매모호한 관계따위,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을 잘아는 윤택이었기에 일부러 넘기고 있었고.



"아무것도 없다하면 믿지 않겠지."
"..."
"사람과 사람사이의 연모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그것이 중하신 겁니까?"
"내겐 중하다. 내가 널 연모하고 있다."



윤택의 고백에 명훈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 눈동자와는 달리 명훈은 한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윤택을 응시했다.



"난 이미 한성에 처자식을 두고온 몸임을 모르십니까? 게다가 비역질이라니. 형님, 미친게요?"



명훈의 차가운 비웃음에 윤택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윤택의 모습에 명훈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띄웠다.



" 그딴 자기만족을 위해 날 살린거요? 참으로 대단한 연모이올시다. 그래, 현 조선에선 날 어찌할 수 없으니, 반역이라도하여 날 그 손에 넣어보겠다. 그런 심산인가본데... 내 한때 동경하고 존경했던이가 이정도의 그릇이라니, 실망이오."


완전히 핏기없이 질린 모습을 보며 마지막 확인사살까지 날린 명훈이 요에 누워 윤택을 외면했다. 그 모습에 하얗게 질렸던 윤택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졌다.


홱-


갑 자기 젖혀진 이불에 당황하던 명훈은 곧이어 제 입술에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당황해서 몸을 버둥거렸다. 상대를 떨어뜨려 놓기 위해 가슴을 밀어내던 손이 잡힌탓에 가만히 당하던 명훈이 제 입속을 배회하는 혀를 깨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졌을때 명훈은 입가에 작은 핏방울이 맺힌채 아무런 표정없이 명훈을 바라보는 윤택을 볼 수 있었다. 꽤나 오랫동안 윤택을 알아온 명훈조차도 처음보는 표정.




"그래, 내 널 원했지. 널 이리 내 아래 눕히고 범하는것을 꿈꾸었더랬다. 네 말대로 내 그릇은 이정도밖에 되지않는 것이겠지. 반역을 통해 널 이리 내 손에 넣었으니, 내가 맘대로 처리해도 되는것 아니겠느냐?"
"맘대로 해보시오. 그런다고 내, 굴복할거라 생각진 않는게 좋을겁니다."




---




"흐, 으아악- 큿..."
"입술, 깨물지 말아라."



서로의 맘을 열지않은채 이뤄지는 정사는 잔혹했다.
애 무라기보다는 능욕에 가까운 움직임, 단 한번도 생각지도 못했던 행위에 명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것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파리하게 질린채 몸을 덜덜떨며 제 욕망을 받아내는 명훈을 범하는 윤택의 표정또한 더할나위없이 비참했다.



"아읏- ...크으... !! 흐앗.."
"날 욕해도 좋다. 네 몸만을 탐한다, 그리 비웃어도 좋아."



고통과 쾌락으로 흐려진 명훈을 바라보며 윤택이 고통스레 그리 속삭였다.



"그렇게라도, 널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네 몸만이라도 내 것이라- 그리 믿고싶다."
"아아윽- 흐,,, 으..응... 하읏!"



그 와 동시에 거칠어진 윤택의 용두질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곧이어 윤택의 움직임이 멈춤과 동시에 눈을 감아버린 명훈. 그저 기절한것임을 안 윤택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 흰 몸에 새겨진 자신의 욕망의 흔적들, 피와 제 정액으로 엉망이 된 명훈의 비부. 그 모든 것이 괴로웠다. 채 다 낫지도 않은 아이의 도발에 분노에 휩쌓여 범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처음에야 지독한 분노와 섭섭함에 시작했지만, 도저히 멈출수가 없었다.
희고 깨끗한 몸, 성인임에도 순진한 눈동자, 제 자신을 유혹하는듯한 달큰한 체향. 게다가 싫다곤하면서도 거부의 행동을 보이지않는 명훈의 모습에 제 욕망에 휩쌓여 거칠게 대해버린것이 못내 죄스러운 윤택이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명훈아."





---




"나오셨소?"
"...홍장군."
"후회는 하지마시오, 호원. 그것이 도리어 더 큰 상처로 남는 법이외다. 그런 죄책감을 안고 그를 볼 셈이요?"



작게 열린 문사이로 풍기는 비릿한 살내음과 피냄새. 그리고 죄책감과 후회로 얼룩진 윤택의 표정에 홍경래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미 저지른일에 저런 얼굴을 하는것은 옳지않았다.



"기억하시게. 자넨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것을."
"고맙네, 홍장군."
"별말을."


멀어져가는 홍경래를 바라보며 윤택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상처입은것은 너인데, 내가 상처입은것처럼 행동하면 안되겠지.



====



점 점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상황이 급박해지는듯 했다. 자신의 냉대에도 매일같이 찾아오던 그의 모습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것을 보면.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곤했다. 어째서 자신이 그를 떠올리고 있는것인지. 매일같이 바쁘게 지내던 나날에서 벗어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생각을 하게된탓에 쓸모없는 고민이 많아진 것이리라, 그리 넘기기로 했다.





"잘.. 지냈느냐? 식사는?"



"잘하고 있었으니, 너무 신경쓰지마."




그 날 이후 그에게 존대를 하는것은 포기했다. 아무리해도 그에게 다시금 옛날처럼 행할수가 없었다.





"그래..."




자리에 누운 자신의 옆에와 낮게 중얼거리며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눈물나게 안타깝고 슬퍼서,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내게, 다정하게 대하지마. 날, 흔들지마.





[윤택명훈] 반란(叛亂) 下





처 음의 그 폭력과도 같은 정사 이후 윤택은 종종 명훈을 품에 안았다. 그저 체념한듯한 얼굴로 지금껏 지켜오던 자신에 대한 존대도,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도, 모든것을 잃어버린채 자신을 서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명훈의 모습에 지독한 상실감과 고통을 느꼈지만, 그것은 내가 표현할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무조건적으로 밀리기만하던 현들도 점점 대항하기 시작했고, 더이상 세를 늘리는것도 힘들었고, 게다가 불안한듯 동요하는 군사들의 모습에서 어쩌면 마지막이 멀지 않았을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명훈아."

"..."


아무런 표정없이 자신을 흘깃 응시하는 명훈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등을 돌린채있었지만 제 말을 듣고있음은 알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 다가오는것같다."



"..."



"만약 이곳이 함락된다면, 넌 어찌될것 같으냐?"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겠지. 운이 좋아 살아남는손 치더라도 한성의 저택에 갇혀 평생 유폐된채 살아가거나. 반란군에게 지고, 추하게 포로로서 목숨을 부지한 자에 대한 벌은 그것뿐야."


"우찬성대감의 자제에게 그정도의 처벌을 내리진 않을테지."



윤택의 말에 명훈이 몸을 일으켜 윤택을 바라봤다. 그 어느때보다 더욱 차갑고 냉기마저 감도는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 그거, 나에 대한 모욕이라 받아들여도 되는건가? 내 이리 당신에게 매여있다고 그리 쉬이보이던가? 아비의 권세를 믿고 방자하게 날뛰는 그런자라- 그리 생각한건가! 얼마나 내가 우습게 보였는지 알만하군. 임윤택, 당신이 그딴 소릴 할 정도면 말야."



한 참동안 자신을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누운 명훈. 그런 명훈을 바라보던 윤택의 표정이 난감하게 변했다. 이 강직하고 올곧은 명훈이 그럴리 없음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있었다. 어릴적부터 제 능력으로 인정받는것을 제일 기뻐했음을, 제 노력이 제 아비의 권세때문이라 칭해질때의 그 분노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 어찌 이리 실수를 해버린건지.. 한참이나 명훈의 등을 바라보던 윤택은 낮게 한숨을 내쉰 후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와 답답함에 달을 바라보던 윤택의 모습에 홍경래가 다가왔다.





"또 왜 그런 표정인게요?"

"누구보다 명훈이 녀석의 성격을 잘 알면서, 실수를 해버렸네."



낮게 한숨을 몰아쉬는 윤택의 모습에 홍경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냉담하고 방관적이던 사내가 어찌 그에게만 저리도 물러지는지.



"어릴적부터 자존심이 강했지. 제 아비의 권세에 아첨하는 이들을 혐오하고, 제 능력으로 모든것을 하려고하는, 그런 고집센 어린아이였어."

"꽤나 권세가 도련님치곤 의외로군요."

"의외지. 강직하고 올곧은, 그런 성격이 눈에 보이는게 어찌나 귀엽던지. 그런 이에게 아비가 권세가 있으니 괜찮을것이라, 그리 얘기했으니 저리 화를낼수밖에. 다른이도 아닌 내가 했음이니."

"호원이 했다는게 문제가 되는거요?"

"어쨌든 그와 가장 가까운게 나아닌가."




흐린 웃음을 짓던 윤택이 낮게 한숨을 내쉰 후 표정을 굳혀 홍경래를 응시했다. 방금전까지의 고민이 마치 거짓처럼 차갑고 냉담한 얼굴이었다.




"관군의 움직임이 심상치않다지?"

"썩어도 준치라는 것이겠지요."



홍경래의 말에 윤택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일이 너무 많았다.



'운이 다한것인가...'



***




음력 4월 17일 정주성



"호원, 이제 운이 다한것같소이다."

"어찌 그리도 약한 소릴 하시는게요?"




말은 그리하지만 윤택의 얼굴 또한 밝지만은 않았다. 그런 윤택을 보며 홍경래는 쓰게 웃었다. 그 누구보다 머리회전이 빠른 남자다.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어찌 모를까.



"그대에겐 우찬성의 자제인 천평도 있지 않소. 그를 살려야지요."



"..."




복잡한 윤택의 얼굴을 보며 홍경래는 웃었다. 그대가 그와 엇갈리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자신이니 적어도 이런 사죄는 해야할터였다.




"가시오, 호원."



"미안하네."



"부디, 살아남아서 행복해지길 빌겠소."





방 밖으로 멀어져가는 윤택을 보며 홍경래는 낮게 중얼거렸다. 아마 힘들테지만, 그라면 왠지 가능할 것 같기도했다.






---






허억- 허억-


어 두운 산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위험했다. 조금만 더 달아나 청의 국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을테지만, 평안도의 산악지대는 너무도 험난했다. 한참을 움직이던 윤택은 완전히 지친 명훈을 보며 결국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하게 높은 나무들 덕에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것은 다행이나, 동시에 지독하게 험난한 지형은 그들의 체력을 금방금방 앗아갔다. 특히나 전형적인 선비로서 공부만해온 명훈에게는 더더욱.




"괜.. 찮은거냐?"

"하아.. 괜찮습니다."




사흘 전 정주성이 함락된 후 거의 쉼없이 달려온 명훈이 괜찮을리 없건만 명훈의 얼굴은 고집스러웠다. 하지만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에 괜히 제 욕심으로 명훈을 데려온것이 아닌가싶어 윤택은 괴로운 기분이었다.




"너무 고집피우지마라."

"괜. 찮다해도 왜 그러십니까, 성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명훈의 어조는 거의 예전과 비슷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런 사소한 것이 기뻐, 윤택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 알았다."



그 때였다.




「저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곳임에 틀림없어!!」




조금 멀긴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택과 명훈의 몸이 굳었다.



"저 쪽으로 가자."




급 박하게 말하는 윤택의 모습에 명훈 또한 지친 몸을 일으켰다. 거의 먹은 것이 없는 탓에 순간 어질한 명훈이었지만, 윤택에게 짐이 되는 것은 싫었다. 따지고 보자면 납치인 상황인데 어째서 자신은 윤택을 따르는 것인지 알기 어려웠지만, 그랬다.

자신의 손을 잡는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쏴-


후두둑- 후두둑-



마 치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쏟아지는 비를 보며 윤택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청이 멀지않았거늘, 이 비 때문에 발이 묶인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간신히 동굴을 발견해 비를 피하긴 했지만, 이미 비를 잔뜩 맞은 명훈은 입술이 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명훈아."




윤택은 명훈의 팔을 잡고 제 품으로 끌어들였다. 완전히 얼어버린 작은 몸이 아무런 저항 없이 가볍게 그의 품으로 딸려왔다. 자그마한 그 온기가 눈물나도록 가여워, 안쓰러워 윤택은 그저 입술만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널 놓아주는 것이 좋을까?

윤택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명훈을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근처에있는 관군들에게 들킬까봐 차마 불도 피워주지 못함이 못내 미안했다.



「여기 흔적이 있다!」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윤택은 눈을 감았다.




내가 널 어찌 지켜야 좋은 걸까? 네가 대답해주렴.






동굴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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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훈이 백련각(白蓮閣)으로 들어간것은 8살이었다. 부모의 고리대의 빚은 가족을 풍비박산냈고, 어렸던 명훈은 청기(靑妓 : 춤&노래만 부르는 기생)나 홍기(紅妓 : 몸을 파는 기생)를 위한 몸종으로서 백련각에 팔려왔다. 그랬던 명훈의 재능을 알아본것은 행수(行首)인 지란(智蘭)에 의해서였다. 가늘고 조그만 체구와 곱상한 외모. 사내아이 답지않은 고운 목소리. 우연히 명훈의 노랫소리를 들은 지란에 의해 명훈은 청월(淸月)이라는 기명을 받고 기생이 되었다.





"이름은 청월이라 하옵고, 저희 백련각에서 제일로 노래를 잘부르는 아이이옵니다."

"지란,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어찌 아니 들어보겠나? 한 번 불러보거라."





명훈은 그저 낮게 눈을 내려깔며 거문고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기생 청월에게는 그 무엇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윤택명훈] 기생







명훈은 백련각 후원에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재주로는 백련각, 아니 한양 제일이라곤 하나, 어차피 사내. 명훈을 경멸하는 다른 기생들이 명훈에게 말을 걸리가 전무했다. 다만 한 존재를 제외하고.





"어찌, 또 넋을 놓고있어."

"별것 아닙니다. 어찌 이 곳에 오신겝니까?"

"이틀 뒤 중요한 손님이 오실게다. 너도 익히 들어봤겠지? 좌판서이신 임대감님의 막내 자제분. 그 분께서 네 재주를 구경하고싶다 하시더구나."

"그러하옵니까?"





그저 낮게 물어오는 명훈의 음성에 행수인 지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생팔자 더럽다만은 너만 하겠느냐?





"어쩌면, 네 머릴 얹겠다 하실지 모르겠구나."

"머릴... 얹는다?"





명 훈은 입술을 깨물며 반문했다. 제 나이 벌써 17. 계집아이의 나긋나긋한 곡선은 커녕 사내놈의 딱딱한 몸으로 변화하고 있거늘, 어찌 사내자식의 몸을 꺽어보겠다는 이가 이리도 많은가? 재주를 파는것도 모자라, 이젠 몸마저 팔아야하는 그런 신세가 되어버린겐가? 이미 몇차례나 머리를 얹어주겠다던 양반님네들을 거부해왔거늘. 하지만 명훈 자신도 잘알고 있었다. 더이상 미룰수도 없다는것을.





"제가, 사내임을 모르는 분이십니까?"

"아실게다. 백련각의 기생, 청월이 사내라는것을 모르는 한양사람도 있다더냐?"

"그렇겠지요. 알아들었습니다, 행수. 이만- 가보셔도 괜찮습니다."

"정녕 괜찮더냐?"

"제 의지따위 아무런것도 아님을 잘 아시잖습니까?"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던 지란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명훈은 그저 하늘을 응시했다. 이미 눈물따위 말라서 흐르지않은지 오래였다.





"지치는구나. 참으로,,, 지쳐."





이 창살없는 감옥에서 나갈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낱 새들조차 저리도 자유로운데, 어찌 자신은 원하는곳에도 못나가나? 괴롭게 한탄하는 명훈의 모습이 유난히 지쳐보였다.





-





"대단... 하군."

"한양에서 제일로 노래를 잘부른다 하였다만, 이정도일줄이야."





명훈의 노래가 끝나자 잠시 멍하니있던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감탄했다. 곱고 맑은 그 미성은 그들이 예상한 것 이상이었기에.





"과찬이시옵니다."

"아니, 과찬이 아니다. 참으로 놀라운 솜씨였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젊은 사내의 말에 주변의 사람들이 다들 동조하며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명훈은 직감적으로 저 사내가 임대감댁의 막내 자제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 곳으로 오너라."

"네."





가까운 곳에서 본 사내는 헌헌장부가 따로 없음이었다. 훤칠한 외모와 훌륭한 성격. 듣자하니 뛰어난 재능과 나랏님의 총애마저 받는, 축복받은 존재. 순간 저도 모르게 칙칙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명훈은 사내에게 술을 따랐다.





"내, 임윤택이라 하니라."

"기생, 청월이옵니다."

"청월이라.. 맑은 달. 좋은 기명이로구나. 여기서는 더 이상은 묻지않으마."





윤택은 참으로 친절하고 다정했다. 기생이라하여 그저 무시하는것도 아니라 다정하게 웃기도했고, 명훈을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명훈이 그리 생각한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술자리가 계속되자 점점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명훈 또한 윤택에게 이끌려 방으로 옮겨졌다. 이미 어느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두려움에 떠는 명훈을 보며 윤택이 물었다.





"내가 처음이더냐?"

"...네."





망 설이며 답한 명훈의 모습에 윤택이 낮게 웃으며 옷고름에 손을 가져갔다. 분명 사내라하였건만 이 작고 가녀린 모습은 웬만한 계집 이상으로 여렸다. 저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저고리 고름을 풀어내자 보이는 뽀얀 피부. 하나하나 옷이 벗겨지며 가늘고 작은 몸이 점점 윤택의 눈앞에 드러났다. 이 아름다운 몸을 처음으로 허락한 상대가 자신이라 생각하자 치밀어오르는 정념을 견딜 수 없었던 윤택은 거칠게 명훈을 넘어뜨렸다.





"읏-!"

"네 이름이 뭐지? 기명이 아니라, 이름."

"아.. 아프옵.. 으읏!!"

".. 네 이름을 물었다."

"며.. 명훈.. 김명훈..."





거칠게 제 손목을 잡고 강요하는 윤택의 모습에 명훈은 약간 눈물이 고인 눈으로 힘들게 답했다. 두려웠다. 다정하고 착해보이던 사내가 보이는 이 격렬함이.

그런 명훈의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생각한 윤택이 다정스레 명훈의 눈물을 닦아주며 낮게 속삭였다.





"명훈이라.. 좋은 이름이로구나."

"..."

"내 이름은 임윤택이다. 기억해두거라. 네 첫남자가 될터이니."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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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있잖아요, 누굴 생각하던지간에 그건 관계없는데, 적어도 관계시엔 날 좀 보지 그래요?"


흥분에 의해 상기된 음성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기지마. 너나 나나 마찬가진데 무슨 개소리냐."


평시의 밝은 음성과는 전혀 다른 색기어린 느른한 목소리에 광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렇네요."




[광선명훈] 어긋난 시선




임 윤택과 박승일은 연인관계였다. 그리고 박광선은 임윤택을, 김명훈은 박승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결코 이어질리 없다는것을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김명훈도, 박광선도 제 자신의 감정보다 울랄라세션이라는 팀을, 그리고 제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도 좋아했기에. 차라리 미워했다면 나았을까? 하지만 김명훈은 임윤택을, 박광선은 박승일을 미워하기에는 멍청하리만치 착했다.

그랬기에 괴로워하던 두명이 선택한것은 우습게도 별다른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던 또다른 상대였다. 이것이 옳지 않다는것은 명훈도, 광선도 지독하게 잘 알고 있었다. 명훈과 광선의 관계는 서로의 상처를 후벼파는 것과 동일했다.

가 끔 생기곤하는 두명의 잠자리는 지독하게 무미건조했다. 다정한 밀어(蜜語)도, 애정에 가득찬 애무도, 그 무엇도 없는 그저 욕망을 채우기 위한 그런 관계. 차라리 그런 관계가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명훈은 생각했다. 끈적함이 없는 그런 담백한 관계가.

젊은 녀석이라 그런지 방금전의 관계를 한 것 치고는 힘이 넘쳐나는 광선을 바라보며 명훈이 눈을 감았다. 그런 명훈을 바라보며 광선은 기묘한 기분에 휩쌓였다.

이 런 관계가 되기 전까지만해도 명훈은 어디까지나 좋은 형, 친절하고 섬세하고, 약간은 소심하지만 다정한 형이었다. 지금은... 글쎄? 사랑은 아니었다. 광선이 사랑하는것은 무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 제 눈을 한번에 사로잡았던 윤택이지, 명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리 살을 맞대고 서로간의 몸을 섞으면서 명훈을 향한 감정이 변하지 않을 리 없었다. 종종 제 품에서 바르작 떠는 명훈이 가엽고, 너무나 약해 안쓰러울때가 있었다.
작고, 섬세하고, 상냥한.


"명훈형."
"왜?"


잠 시 멈칫거리며 이름을 부르자 명훈이 눈을 떠 광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약하게 떨리는 지친 눈동자가 조금 안타까웠다. 광선 자신이나, 명훈이나 이뤄지지 않을 사랑에 괴로워하며, 결국 이리 망가져가는걸까? 광선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다른말을 꺼냈다.


"........괜찮아요?"
"고양이가 쥐생각하냐? 괜찮아."


퉁명스레 내뱉기는 하지만, 그리 불쾌한 눈빛은 아닌터라 광선은 웃으며 고개를 숙여 명훈의 귓가에 낮게 숨을 불어넣었다.


"야!!"
"한 번 더 할까요?"


어두운 욕망에 빛나는 그 눈동자를 보며, 명훈은 그저 눈을 감았다.


"니 녀석이 말린다고 들을 녀석이냐? 네 맘대로 해."
"쿡쿡.."



---



"너나 나나 미친게 틀림없어."


명훈이 울며 애원할때까지 애태우며 괴롭힌 광선으로 인해 완전히 지쳐버린 명훈이 침대에 누워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관계. 지속 못하잖아요?"
"그래. 그야 그렇지."


광선의 말에 답하던 명훈이 완전히 쉬어버린 제 목소리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그래도 요새 몸이 좋지않아 같이 나쁘던 목이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다.


"야! 너 내일 노래는 어떻게 부르라고 이 모양을 만들어놨어!!"
"감기라고해요. 뭐, 그런거가지고 걱정해요?"


아 무렇지 않게 느긋한 광선의 말에 더 열이 뻗치는 명훈이었지만 저 박광선녀석이 이런거에 더 신경쓸만한 녀석도 아니기에 결국 명훈은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당분간 다른 사람이랑은 목욕도 못할만큼 울긋불긋한 몸, 지끈지끈거리는 허리, 긴장한 근육으로 인한 몸의 통증탓에 열불이 뻗치는데 더이상 광선에게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얌마!! 어딜 또 만지는거야??!!! 난, 더이상은 무리라고. 몇일 누워있게 만들 셈이냐??!!!"


다시 허리를 만져오는 손길에, 처음에 서툴렀던 광선으로 인해 일주일넘게 앓아누웠던 지독한 기억을 떠올린 명훈이 기겁을 하면서 소리쳤다. 진짜 더이상했다가는 누워있어야 할 상태였다.


"설마, 저도 양심이 있는데 안해요. 그냥 마사지 해드릴테니까 가만히 있어요."


어디까지나 두명의 관계는 섹스파트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에도 지나치게 친절한 광선의 행동에 실랑이를 벌이던 명훈이 결국 침대에 몸을 묻었다. 상냥한 손길에 명훈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것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이 승일을, 광선이 윤택을 사랑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관계가 되었다면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상냥함은 저를 좀먹는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잠든 명훈의 모습에 광선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상냥함이 명훈을 괴롭힘을 알고있음에도 냉정할 수 없었다. 죄책감에, 미안함에, 결국 일그러진 제 상냥함이 명훈을 놔둘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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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하지만 나, 당신 옆에 있을 수 없어.”


몇 번째 헤어짐일까? 윤택은 멀어져가는 여자를 보며 담담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윤택이건만 어찌된 것인지 연애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고작해야 6개월에서 길어야 1년 남짓. 그것도 모두 상대방의 거절이었고, 게다가 하는 말 또한 똑같았다. 당신 옆에 있을 수 없다. 당신은 날 바라보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윤택은 알 수 없었다.




[윤택명훈] 열정 01




“축하한다, 임윤택. 몇 번째 차이는거냐?”
“몰라.”


자신을 놀려먹는 영진의 목소리에 담담하게 답하며 윤택은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윤택을 바라보던 영진은 들리지 않게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 택은 좋은 녀석이었다. 친절하고 다정하며, 배려심 넘치는 멋진 남자. 허나 그럼 뭘 하는가? 윤택은 인간관계에 있어 이상할정도로 담담하고 냉정하게 반응했다. 윤택의 친절은 하나의 벽을 두고 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다가가기 쉽지만, 그 이상의 허용은 하지 않는 냉혹함. 윤택의 벽을 넘어간 이는 극 소수였고, 그 중의 한명이 자신이었고, 울랄라크루 중 울랄라세션이라 이름붙인 팀원들. 그 외엔 가족밖에 없었다. 여자들 또한 사귀며 그런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그랬기에 잔혹한 다정함을 지닌 윤택을 원망하며 결국 멀어져버린다. 아마 윤택도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을 터였다.


“넌 정말 어려운 녀석이야.”
“나도 알아.”


윤 택은 방금 전 헤어진 사람답지 않게 아무런 감정 없이 중얼거린 뒤 피식 웃었다. 사랑이라. 그다지 믿기지 않는 소리로군. 앞에서 술을 마시는 영진을 보자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것은 윤택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에겐 사랑이라 칭하는 그 감정놀음보다 음악이 중요했고, 춤이 훨씬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사실 울랄라세션의 맴버인 승일, 명훈, 광선이 자신의 안으로 다가온 것도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일이었기에. 윤택은 자신이 얼마나 냉정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넌 너무 인간관계가 삭막해. 사실 난 네가 걱정스럽다. 임윤택. 넌 타인에게 너무 무관심해. 네 세계엔 너 밖에 없어. 그걸 알기에 난 두렵다. 언젠가 네가 떠나버릴까봐.”


진지하게 말을 건네는 영진의 모습에 윤택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나도 내가 두려운데, 너라고 별 수 없겠지. 윤택은 영진이 건네는 그 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음악이 있고, 춤이 있는 한 그럴일 없을꺼다.”
“우리의 옆에 있는다는 소린 안하지?”


윤택은 아무런 대답 없이 술을 마셨다. 내가 답할 수 없는 물음은 던지지마.



---



“윤택형-!!”


명 훈이 환하게 웃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윤택의 옆으로 다가왔다.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녀석은 귀여웠다. 곱게 휘어지 눈꼬리도, 얼굴에 환하게 띄워진 미소도, 약간은 상기된 목소리도 모두.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아저씨인 녀석이 이리 귀여워서야 원. 울랄라세션의 맴버들은 윤택 저와 비슷한 성향이었다.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홀로 선 녀석들. 다만, 이 녀석들은 저보단 훨씬 관대하고-

인간적이었다.


“어제 술 많이 마셨다고 군조형이 그러던데?”
“쓸모없는 소리를 내뱉었잖아, 그 녀석. 그렇게 많이 안마셨으니까 걱정 말고 연습이나 하러가자.”


녀 석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연습실로 들어가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음을 맞춰보던 광선도, 혼자서 뭔가를 고민하는 듯 악보를 들고 끙끙거리던 승일도 환히 웃으며 윤택을 맞이했다. 지나치게 맹목적이고 다정한 녀석들이라 약간은 곤란하다 생각하는 윤택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윤택을 보자마자 바로 입을 열었다.


“형, 어제 술 많이 잡수셨다면서요?”
“얼마나 마시셨기에 군조형이 그렇게 걱정하시는거에요?”
“그리 걱정할 만큼은 아니니까 괜찮아. 야, 살다보면 술도 마시고 그러는거지, 뭐.”


아 무렇지 않은 듯 답하는 윤택의 모습에 조금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면서도 녀석들은 포기한 듯 자리로 걸어갔다. 영진이 녀석, 한 번도 자신을 잃을 만큼 마셔본 적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저리 걱정이 심했다. 요새 속이 조금 안 좋다는 얘기를 한 탓인지도 몰랐다. 하여간 영진의 앞에서는 말도 조심해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윤택이 동생들과 음악에 대한 상의를 시작했다. 저에게 엄격한 만큼 타인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성격과 완벽주의자적 성향을 지닌 윤택 덕에 가볍게 시작된 상의는 생각이상으로 본격적인 것이 되어있었다. 겨우 2시간 가까운 긴 시간의 상의의 탈을 쓴 회의를 마친 그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축 늘어졌다.


“진짜, 윤택형 체력도 좋지. 진짜 형의 저 완벽주의적 성격은 좀 지나치지 않아요?”


광 선이 아직도 악보를 보고 있는 윤택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제일 젊은 자신보다 훨씬 팔팔해 보이는 모습이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했다. 그런 광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승일과 그런 힘조차 없는 듯 대답 없이 늘어진 명훈의 모습을 바라본 윤택이 피식 웃었다. 말들은 그리해도 실제 불만은 없다는 것을 아는 탓이었다.


"어중간한 것보다는 낫지. 이제 끝났으니까-"


윤택이 웃으며 맴버들을 응시하자 가장 밝고 활달한 명훈이 눈을 빛내며 윤택을 응시했다.


"고기나 먹으러갈까?"
"찬성!!"
"저도요."
"나도~"


윤택의 말에 혹여나 말을 바꿀까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윤택이 웃었다. 아아- 내 옆에서 너희들이 웃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있고, 가장 좋아하는 춤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따윈 필요치않아.



-



"별거 아니래요, 형."


홀 로 결과를 기다리던 윤택은 붉게 변한 눈가와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승일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비밀을 감추려해도 승일은 얼굴에 잘 드러나는 편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문제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불러 이야기한다는 패턴은 너무나 뻔했다.


"야. 그런 표정이면 누가 봐도 암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식으로 던진 저의 그 말에 다시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을 바라보며 암담함을 느꼈다. 아니길 빌었는데 결국 나쁜 예감은 사실이 되어있었다.

내가 지나치게 타인에게 무심했던 벌을 받는가보다. 나는 괜찮은데, 내게 있어 죽음은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질 않는데, 나보다 아파하고, 나로 인해 상처입을 너희들을 생각하니 괴롭다.




[윤택명훈] 열정 02




윤 택의 소식을 들은 광선은 믿기지 않는듯 아닐거라고 절규하며 울었다. 승일은 그런 광선을 바라보며 같이 울었다. 허나, 명훈은 울지 않았다. 그들의 연습실이 눈물바다가 되어버렸음에도, 평상시의 풍부한 감정표현과는 달리 그저 입술만을 깨물뿐, 놀라울만큼 담담하고 서늘한 표정으로 그저 듣고, 그들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윤택이 병원에서 돌아왔을때에도 승일과 광선의 울음을 달래고, 분명 괜찮아 질것이라 그리 담담히 말했다. 광선이 그런 명훈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듯 화를 내며 소리쳤다. "형은 윤택형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수 있어!!"라며.

언제나처럼 연습실에 나타나,
언제나처럼 연습을 하고,
언제나처럼 집으로 향하고,

광선은 그런 명훈을 보며 화를 냈다. 종래에는 "저렇게 냉정한 사람일줄 몰랐다."며 그리 실망한 말투로 명훈을 외면했다. 승일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명훈에게 내심 서운해지는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질꺼에요, 윤택형."


명 훈은 그저 윤택에게 그 한마디만을 건넸을뿐, 다른 행동은 전혀 하지않는것처럼 보였다. 그 직후 윤택은 항암치료를 위해 연습실에 나타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그리 윤택이 없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날 무렵 겉으로는 괜찮아보이던 명훈의 이상을 알아챈것은 승일이었다.
명훈은 원래 마른녀석이었다. 원래 마른 체질인데다가 입도 짧고, 소식을 하는탓에 명훈의 몸무게는 언제나 50대 초반을 유지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지금의 명훈은 마치 쓰러져버릴것처럼, 병적으로 말라있었다.


"야! 김명훈. 잠깐 애기 좀 하자."
"읏- 형, 아파요."


승일이 잡아챈 팔을 빼내며 작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명훈이 항의했지만 승일은 그것에 신경쓸 수 없었다. 그 손에 잡힌 명훈의 팔은 그야말로 뼈밖에 없다라는 말이 어울릴만큼 말라있었다.


"형? 저 가봐야되서 미안해요."
"아니, 저-"
"죄송해요. 내일 얘기해요."


명훈이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달려나가버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광선이 승일에게 다가왔다.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어요, 형?"
"명훈이, 원래 저렇게 말라있었나?"
"원래 마른 사람이잖아요."


광선은 아직 명훈에 대한 섭섭함이 풀리지 않은 듯 퉁명스레 답했지만, 승일은 그런 광선을 보면서도 명훈에 대한 걱정을 버릴 수 없었다.


"김명훈, 너.. 어떻게 된거야?"


그 정많고, 다정한 녀석이 이상하리만치 냉정하게 구는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승일은 윤택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명훈에 대한 걱정으로 낮게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근래 윤택이 입원한 뒤로는 연습을 마치자마자 일분일초가 급한것마냥 급박하게 나가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원망스러운 기분이 드는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



거의 열흘만에 병원에서 돌아온 윤택은 아무렇지않게 웃으며 들어왔다. 언제나 기르고있던 머리카락을 완전히 다 밀어버린 모습이었지만, 그런 모습조차 눈물나게 반가운 기분이었다. 광선 또한 윤택의 모습을 보고 머리를 다 밀어버린탓에 왠지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승일은 명훈을 바라봤다. 윤택 이상으로 초췌해진 명훈은 그런 윤택을 보며 힘없이 옅게 웃고있었다.


"야, 박광선. 너 진짜 안 어울린다. 그러니까 그냥 다시 길러라."
"네?!!"


아무렇지않은 표정으로 말하며 웃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윤택의 모습에서 안도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윤택은 울랄라세션의 중심이고,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연습을 끝내고 한명한명의 단점을 지적하는 모습조차 그대로라 윤택이 암이라는 사실이 마치 지독한 거짓말같았다.


"마지막으로, 김명훈. 너 노래에 힘이 너무 없다. 너 자신도 느끼고 있지? 네 맘에 안드는 노래는 다른 사람이 듣기에도 좋지 않다는거 네가 더 잘알거라 믿는다. 게다가 호흡도 조금 부족하니까 그것만 주의하도록!"
"네."


윤택이 명훈에게 지적한것은 승일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여전히 명훈의 노래는 훌륭했지만 언제나 꽉 차있는듯한 그런 느낌이 부족했다.


"자- 그럼 해산."




-



윤 택의 재입원이후 근 일주일만에 병실에 찾아온 승일은 안에서 낮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고개를 기울였다. 얇고 가는 미성은 분명 윤택의 음성은 아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본 승일은 바보같은 원망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




고요한 병실에서 명훈의 무릎을 베고 잠든 윤택과 조용히 눈을 감은채 노래를 부르는 명훈의 모습이 지나치도록 서글퍼서, 안타까울만큼 사랑스러워서, 승일은 그저 문에 기댄체 눈물만 흘렸다.






[윤택명훈] 열정 03






윤 택에게 입원이라는 것은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지금껏 살도록 입원할만큼 심하게 아팠던적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지독한 아픔이라던가 그런것이 없었기에 윤택에게 암이라는 병명이 실감이 나지 않는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윤택 자신이 지닌 죽음에 대한 개념이 타인과는 전혀 다른탓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녀석들이 우는건 조금 많이 괴로웠어."




윤 택이 암이라는 것을 알게된 순간 마치 제 자신이 암에 걸린것마냥 서럽게 울던 광선과 그저 저를 바라보며 눈물만 뚝뚝 흘리던 승일, 아무렇지 않은듯 말을 꺼냈지만 입술을 깨무던 명훈의 모습이 기억나 윤택은 조금 가슴이 아팠다. 타인에게 아무리 냉담한 윤택이라고는 하지만 그들과의 세월이 벌써 15년이었다. 윤택일지라도 그들에게 소중한 감정이 싹튼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벌써 사흘째인가? 정말 지나치게 한가한데.."




언 제나 하루가 모자를만큼 의욕적인 생활을 하던 윤택에게 있어 그저 병원이라는 공간에 갇혀있어야하는 생활은 그야말로 창살없는 감옥과 마찬가지인지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다른 맴버들을 부르기에는 사흘전 입원하던 날 찾아와 울던 광선과 승일의 모습이 맘에 걸려 차마 부를수가 없었다. 게다가 명훈은 사흘째 전혀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섭섭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만, 소식을 듣는 순간 괴로움에 일그러지던 명훈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드는탓에 약간은 안도도 같이 드는것은 자신이 어리석은 탓이겠지.



똑- 똑-



느리고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들렸다. 잘못하면 놓칠만큼 작고 미약한.




"네. 들어오세요."
"혀엉- 죄송해요."




문 이 살짝 열리고 들어온것은 추위에 붉게 상기된 명훈이었다. 사흘동안 지독하게 마음앓이를 한 듯 그새 마른 모습의 명훈에게서 미약한 술냄새가 풍기기는 했지만 그리 많이 마신것은 아닌듯했다. 명훈은 조심스럽게 윤택의 침대옆으로 다가와 앉아 침대에 엎드렸다. 밖의 서늘한 공기로 인해 완전히 식어버린듯 명훈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추울지경이었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든 윤택이 손을 뻗어 명훈의 손을 쥐었다. 사내녀석치고는 작은 손은 윤택의 손에 쏙들어왔다. 작고 마른터라 안타까운 녀석이 이 추운 날 어딜 이리 쏘다니는건지. 괜스레 울컥한 윤택이 저답지않게 명훈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러뜨렸다.




"임마- 노래부르는 녀석이 이렇게 추운 날씨에 술마시고 돌아다니면 못써! 안그래도 목에 부담가는 부분만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절제가 뛰어난 명훈이 이리 흐트러진 이유가 저라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좀 더 차갑게나간 제 말에 홀로 당황하고 있을때 쯤, 엎드려있던 명훈이 약간 풀린 눈으로 윤택을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혀엉- 자신이 무지-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인거- 알아요?"




느릿하게 웅얼거리는 명훈의 그말에 심장이 철렁한것은 윤택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어째서 이토록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지금껏 스쳐지나갔던 수많은 여자들과 같은 말인데 이토록 윤택을 흔든것은 명훈이 유일했다.




"형은- 언젠가 우릴- 떠날꺼라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어딘가 한 발자국 물러선 눈으로- 우릴 마치 관찰하듯이-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명 훈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명훈이 하는 얘기는 스스로가 느끼고 있던 진실이니까. 언제나 자신은 울랄라세션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냉정한 눈으로 방관하듯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영진도 말하곤했다. 우리들 옆에 있는다는 소린 절대 안한다고. 넌 지독하게 냉정한 녀석이라고.




"있죠- 사람들이 말하길-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은- 실은- 그 누구에게도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게 맞아요. 형은 사실은- 너무 냉정해. 그래서-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요."




윤택은 아무런 대답없이 고요한 눈으로 명훈을 응시했다. 그런 모습에 명훈의 맑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하지만 시선을 피하지않은채 올곧게 윤택을 응시했다.




"근데- 이건 아니에요. 이렇게- 이런식으로- 떠나버리는거- 그건- 아니에요. 형- 가지마요. 나- 형한테 원망- 안할께요. 그러니까... 우리 버리지마요- 흐윽-"




결 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던 명훈이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나이에 맞지 않게 순진한 눈망울에 눈물이 일렁이는 모습이 안타까워 윤택이 손을 뻗었다. 나는 네가 강하다 생각했는데 잘못 알고 있었구나. 강한것처럼 행하더니 결국 제일 약한건 너였어. 너처럼 약한 녀석을 어찌해야하니, 명훈아.




"안버려.. 버리지 않을께, 명훈아. 그러니.. 울지마라. 응? 형 아무데도 안갈께."




그 리 한참을 달래어 간신히 진정한 명훈의 붉어진 눈가가 안타까워 윤택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에도 미련도 집착도 없다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같았다. 그저 단순히 좋은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었던 울랄라세션 맴버들이 어느순간부터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있었다. 명훈의 눈물에 제 감정이 움직여버릴만큼.




"명훈아."
"...네?"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탓에 약간 가라앉은 명훈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생각을 하며 윤택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노래, 불러주겠니?"
"뭐... 불러드릴까요?"




윤택은 천천히 침대에 누워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명훈을 바라봤다. 정말로 미치도록 너의 노래, 너의 그 목소리가 듣고싶을때가 있다. 오늘이 그 때인듯 싶었다.




"Everytime I Close My Eyes."



"Girl it's been a long, long time comin'



But I, I know that it's been worth the wait



It feels like springtime in winter



It feels like Christmas in June



It feels like heaven has opened up



its gates for me and you



And you've hot me too"






---







명훈은 그 이후 적어도 이틀에 한 번 이상은 윤택을 찾아왔다.



맴버들에게 일어난 사소한 이야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담,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병원에 갇혀있다싶은 윤택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소중한 이야기들.




"명훈아. 너 요새 좀 많이 마른것같다?"
"아아. 조금요."




웃는 모습이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명훈은 아무렇지 않은듯 윤택을 보며 웃어보이곤 했다. 명훈이 힘들어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는터라 윤택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무리하지마라."
"네."




오늘도 노래를 불러주다가 일어서는 명훈을 보며 윤택이 잠에 취한채 말하자 웃음기어린 목소리로 답하고 나가는 명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택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영 진아, 네가 난 너무나 타인에게 무심하다 했었지? 그런데 지금 내가 내 마음을 모르겠다. 저리 슬프고 가엽게 웃는 명훈이나 너무나 걱정스러운데 한편으론 환희로 벅차 오르는 이 감정을 난 모르겠다. 내가 내 감정에 너무나 둔감했기에, 그랬기에 이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난 모르겠어. 현명한 너라면 나의 이 감정에 답을 내려줄 수 있을까?



-



"승일아."
"네?"




윤택은 승일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승일이 아닌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몇일전에.. 보고있었지?"
"아? 네..."




순 간 윤택의 말에 당황하던 승일이 난감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거라 생각했던 윤택이 알고있었다는것을 알자 왠지 민망해졌다. 노래를 부르던 명훈과 윤택의 모습은 뭔가 둘만의 세계같아서 사생활을 본것같은 기분이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승일의 모습에도 윤택은 아무런 표정없이 승일을 응시했다.




"요새 명훈이가 너무 말랐더라. 좀 지켜봐줘."
"네?"
"강한척하는데 실은 너무나 약해서, 그래서 걱정된다. 너나 광선이처럼 겉으로 드러내고 아파하는 녀석이 아니라 혼자 속으로 끙끙 앓을까봐, 그래서 저 스스로를 망칠까. 네가 좀 돌봐줘라."
"네."







[윤택명훈] 열정 04







♩♬  I don't want it wan it 널 원하지만
Don't make me falling ♬♪~


영 진도가 나가지않는 편곡작업탓에 머리를 감싸쥔 승일이 들려온 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Bar Ulala 」




"누구에요?"
"성현이."
"성현이 형요?"




옆에서 물어오는 광선에게 대답한 승일이 폰을 들었다. 친하긴하되 중요한일이 아니면 연락하지않는 녀석이 어쩐일인가 싶었다.




"여보세요?"
「아, 승일이형? 저 성현인데, 죄송하지만 가게에 와 주실수 있어요?」
"하? 알겠다."

갑자기 밑도끝도없는 이야기에 당황한 승일이 전화를 끊은 후 일어서자 광선이 저도 의아한듯 일어섰다. 순간 말리려했던 승일일이었지만, 어차피 상관없겠지 싶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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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어? 광선이도 같이온거야? 하긴, 다행이다."




저를 보자 반색하며 반기는 성현의 모습에 승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승일의 표정에 성현이 난감한 표정으로 하나의 방을 가리켰다.




" 미안한데, 명훈이 좀 말려봐요. 요새 거의 매일 가게에 출근이야. 저러다가 잘못될까봐 걱정이 되서 가만히 놔둘수가 있어야지. 윤택형 입원한뒤로는 한 이삼일에 한번은 와서 마시고 있어요. 처음엔 힘들어서 그런가보다했는데, 지금 벌써 열흘이 넘었는데도 저러는 모습 보니까... 저 녀석, 안 그래도 작은 녀석인데 저러는 꼴 보고있자니 내가 다 답답해."




걱정스레 한쪽 룸을 바라보는 성현의 모습에 승일과 광선의 표정이 굳었다. 승일로서는 얼마전 윤택의 병실에서 봤던 명훈의 모습이 생각나서, 광선은 지금껏 자신이 명훈에 대해 실망해서 계속 퉁명스레 대했던 제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걱 정하는 성현을 뒤로하고 벌컥 문을 열자 보이는것은 나뒹구는 소주병의 모습에 승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작해야 한 병이 한계이던 녀석이 두어병가까이 비운 모습으로 엎드린 모습이라니. 술기운에 잠든 명훈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안아올리자 놀랄만큼 가볍게 제 품으로 들어오는 메마른 체구에 승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윤택이 없으면 제 자신이 형으로서 행동해야했거늘, 자신의 슬픔에 빠져 맴버의 아픔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어리석음이 느껴져 승일은 고개를 떨궜다.

몰랐구나. 난 몰랐어, 명훈아. 윤택형의 병실에서 보이던 괴롭던 네 표정을 보고 알았어야했는데, 난 내 슬픔에 빠져서 몰랐어. 그래서 미안해. 네가 괜찮을리가 없었는데. 네가 아픈게 당연했는데.




"형. 우선 제 집으로 가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승일을 보며 광선이 조심스레 승일을 인도했다. "우선 명훈형을 눕히는게 먼저잖아요?"  광선의 그 말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승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아, 계산은.."
" 아이. 우리사이에 무슨 계산이에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명훈이 녀석 좀 부탁할께요. 학생때부터 제 속내 안드러내는 녀석이라 좀 무뚝뚝해보이긴해도, 사실 이 녀석만큼 착하고 정 많은 녀석도 드물거든요. 그래도 형이랑 광선이랑 있으니까, 다행이에요."
"너무 걱정하지마요, 형."
"응. 그럼 안녕히가세요. 잘가, 광선아."




걱정스레 배웅하는 성현을 뒤로하고 나온 승일과 광선은 광선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집에 도착해 명훈을 침대에 눕히고 나온 승일과 거실에 앉자 광선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 어째서 명훈형은 괜찮은거라고 생각했던걸까요?"
"... 나도 마찬가지야. "




안그래도 가볍던 녀석이었지만, 방금전 업고올때의 명훈은 그야말로 거의 무게감이 없을정도였다.




"저, 명훈형한테.. 상처도 많이주고, 못된 소리도 많이 했는데... 형,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지 독하게 냉정하다고, 형은 울랄라에 대한 애정이 없는거냐고, 어떻게 우리 리더의 일에 그렇게 무관심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냐고, 제가 화낼때 그저 쓴웃음만 짓던 명훈의 표정이 생각난 광선이 결국 눈물을 머금었다.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던 형이었다. 그래서 더욱 섭섭했다. 그랬는데, 저리 혼자 아파하는 줄 알았으면 그리 모질게 대하지 않았을터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광선의 모습에 승일 또한 깊은 한숨을 머금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그러지말자. 그럼 되잖아?"
"...네. 훌쩍."




울고있는 광선을 간신히 달래 방으로 들여보낸 승일은 명훈이 누워있는 방의 침대로 다가갔다. 쏙 들어간 볼살과 퀭한 눈가. 엷은 눈물자욱이 있는 볼과 까칠한 피부가 가슴아팠다.





형. 형의 말처럼 명훈이는 너무 약하네요. 형이 걱정하던것처럼, 그리 혼자서 끙끙 앓고 있었어요. 형이나 나나 광선이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않곤 당당하게 웃더니, 저 혼자서 그리도 앓고 있었어요.

Posted by Lucy_j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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