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산(피안화)
지상의 마지막 잎까지 말라 없어진 곳에서 화려한 영광의 꽃을 피운다 하여 피안화(彼岸花)라고 한다.
지방에 따라서는 꽃무릇·지옥꽃이라고도 부르며, 피처럼 붉은 빛깔의 꽃과 알뿌리의 독성 탓에 죽음의 꽃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인지 꽃말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슬픈 추억'이다.
0.
꿈을 꾼다.
조금 흐린, 잿빛 하늘은 해가 져가며 불그스름한 노을이 지고 있었고, 메마르고 건조한 대지는 오늘도 수많은 피를 머금은 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 대지 곳곳에 널린 살점들이 잔혹했다. 이 잔인하고 흉악한 광경은 내가, 우리 종족이, 이 행성이 늘 보아온 그런
것이었다. 저그와 테란, 프로토스라는 3종족이 물고 물리는 지독한 소모전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내가 태어나던
시기에도 있었으며, 현재에도 반복되는 진행형이었으며, 미래에도 지속될 속박이었다. 마을 하나가 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라지는 것은 이제 와서 반복하기에도 지치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어린아이인가.”
조금 높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남자가 있었다. 겉보기로는 일반 테란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모양새였다. 마치 피를 뒤집어 쓴 듯, 제 색을 알아볼 수조차 없는 머리칼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살짝
내려다보는 붉은 핏빛의 눈동자가, 그가 테란이 아닌 저그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저그라는 종족이 얼마나 잔혹하고, 무서운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터라, 눈앞의 테란형 존재가 저그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몸이
굳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은 그는 느릿느릿,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역겨울 만큼 지독한
피냄새도 강해지고 있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옷은 붉은 피로 엉망이었다. 그것이 전부 제 동족의 피라 생각하니,
눈앞의 남자가 점점 더 두려워졌다. 여유롭게 손을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았다.
툭-
가볍고, 단순한 접촉이었다. 머리위로 얹어지는 가벼운 무게감에 눈을 감은 채 두려움에 떨던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남자는, 저그는, 웃고 있었다.
“어린 것을 죽여 뭐하겠냐? 꼬마.”
피식 웃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한 남자는 제 품속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 손바닥을 그어 내렸다.
후두둑-
눈앞에서 피가 쏟아지는 광경에 하얗게 질린 내 모습을 본 남자는 그저 얕게 웃으며, 그 피를 제 몸에 묻혔다. 볼과 옷자락에 묻어지는 피는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그가 손을 뗐을 때는 작은 흉터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내 피가 묻었으니, 다른 저그족 아이들이 널 공격하진 않을게다. 네 종족의 진영까지 어서 도망치거라, 아가.”
“저그가 왜, 이런 친절을?”
내 말에 남자는 곤란한 듯 웃었다. 살포시 접히는 눈웃음이 예쁘다고, 멍하니 생각하며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고개를 잘래잘래 저었다.
“어린 아이가 죽는 모습은 싫어한단다. 아무리 적대관계라 하나, 어린 것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지.”
“훗날, 당신이 후회할지도 모르는데도?”
“그건 내가 이리 무른 마음을 가졌던 것이니, 어찌할 수 없는 것. 미래의 가능성 때문에 현재 나약한 것을 죽이는 것은 나의 신념에 어긋난다. 내 피의 향기가 약해지기 전에, 어서가거라, 꼬마.”
저그임에도 불구하고 무르고 약한 남자. 하지만, 어딘가 그 남자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난, Flash에요. 당신은요?”
“글쎄다. 기억할 필요는 없을듯하다만... 정 안되겠으면 폭풍이라 부르거라. 너희 테란이 그리 부르곤 하니.”
그와 동시에 남자는 등을 돌렸다. 평범한 테란으로 보이던 그의 등 뒤로 날개가 생겨났다. 그제야 저 남자가, 저그 족임을 깨달았다. 그는, 테란이 아니었다.
“폭풍..”
다시금 그가 가르쳐준 호칭을 중얼거렸다. 이름 없는 자는 아닐 것이다. 저그가 저 정도의 사고를 지녔다면, 상당한 고위급일터.
“다시, 만나고 싶어.”
그저 꼬마가 아닌, 당당한 존재로 다시 만나고 싶다. 그것은 처음으로 내 가슴속에 태어난 갈망이었다.
*
전쟁터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저그족의 영역인 머큐리로 들어선 YellOw는 잠시 하늘에 멈춰 서서 머큐리의 광경을 응시했다.
바쁜 광경이었다. 점차 세력을 확장해나가는 크립의 고동이, 연약하디 연약한 라바들의 꿈틀거림이, 저그족을 위해 언제나 바쁘게
가스와 미네랄을 채취하는 드론들의 바쁜 움직임이, 모든 것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만큼 더더욱.
YellOw가 갓 태어나던 시절, 저그는 참으로 암울했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테란과 개개인이 너무나 강한 프로토스 사이에서
약하기만 하던 저그는 그야말로 멸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나마 강하던 정신체, Forever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저그는 멸했을
터. Forever가 죽어가는 모습에, 오버마인드는 제 종족을 살리기 위해 모험을 했다. 평범한 정신체 2, 3은 충분히 만들 수
있는 힘을 단 하나의 에그에 그대로 집중한 것. 많은 힘이 집중된 만큼, 그 에그는 쉬이 깨어나지 못했고, 간신히 에그가 깨지고
새로운 정신체, YellOw가 태어났을 때는 저그는 간신히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버마인드와 정신체인 Forever의 보호아래 작고 좁은 크립 위로 레어로 진화조차 하지 못한 작은 해처리, 고작해야 두어 마리의
드론과 그 드론을 지키는 저글링 몇 마리, 그리고 스포닝풀 뿐이었다. 간신히 태어난 YellOw는 작고, 연약했으며, 무력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오버마인드의 지배하에서만 사고하는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YellOw는 스스로 생각하고, 사고할 줄
알았다. 사력을 다해 만들어낸 정신체가 그리 작고 약한데다가, 특이하다는 수준을 넘어 돌연변이에 가까운 모습에서 분노할 만도
하건만 오버마인드도, Forever도 YellOw를 사랑해줬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 보답이라도 하듯, YellOw가 성장하여
정신체로서의 자각을 지니기 시작하자, 오버마인드가 그토록 힘겹게 만들어낸 존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폭풍.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저그를 지키기 위해 지나치게 무리했던, Forever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한 YellOw는 폭풍이라는
호칭으로 테란과 프로토스에게 재앙으로 군림했다. 폭풍이 나타났다는 그 한마디만으로도 테란과 프로토스의 사기를 꺾을 수 있을 만큼.
좁디좁은 크립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었고, 오버마인드의 거처라고 하기엔 너무나 열악했던 해처리는 레어를 거쳐 하이브까지 진화했다.
두어 마리의 드론들은 이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그 숫자가 많아졌고, 가장 약한 저글링이 아니라 뮤탈과 울트라리스크,
디파일러가 저그를 지켰다. 그것이 YellOw가 이룩해낸 결과였다. 엄청난 피바다 속에서 이뤄진 성과였다.
그랬기에 저그의 크립들을, 그 크립 위에 웅장하게 세워진 하이브를 보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YellOw는 전쟁의 피로도, 괴로움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YellOw!”
다다다-
하이브로 들어서자마자 달려와 제 품에 안기는 작은 무게감에 조금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YellOw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이 하이브 속에서 작은 어린아이는 새로이 태어난 정신체, n.Die뿐이었다.
“다녀왔단다, n.Die. 잘 있었니?”
“네, YellOw. 다치신 건가요? YellOw의 피냄새가 나요.”
예민하고 민감한 저그답게, 얕게 남은 YellOw의 피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조금, 다쳤었단다. 이제 다 아물었느니 괜찮아. 전쟁에서 어찌 다치지 않을 수 있겠니.”
“YellOw가 다치지 않으면 좋겠어요. 저도 YellOw를 도울 수 있을 만큼, 빨리 크고 싶어요.”
눈을 반짝이면서, 다짐하는 n.Die의 모습에 YellOw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오버마인드는 YellOw의 강력함을
보고난 뒤, 저그가 어느 정도 힘을 지니기 시작하자 새로운 정신체들을 만들어냈다. 그저 그런 수준의 정신체가 아닌, 진정으로 힘을
지닌 강력한 존재를. 오랜 시간과 힘을 들여서 만들어낸 정신체, July와 GoRush 또한 YellOw와 마찬가지로
오버마인드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고를 지니고 있었고, 능력 또한 대단했다. 그런 능력만큼 저그의 힘은 점점 더
강대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탄생한 정신체, n.Die. 아직 발현하지는 않았지만, July와 GoRush 가 어릴 때부터
지켜봐오고, 키워온 YellOw로서는 n.Die가 엄청난 존재가 될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지금이야 약하고 어리지만, 조금만
성장한다면 역대 최강으로 불러도 손색없으리라.
- YellOw.
머릿속에 웅- 울려 퍼지는 오버마인드의 사념에 YellOw는 제 품에 안긴 n.Die를 떼어냈다. 아무리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해도, YellOw 역시 저그. 오버마인드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버마인드께 다녀오마, n.Die. 조금 있다가 보자꾸나.”
“네, 다녀오세요, YellOw.”
베시시 웃으며 배웅하는 n.Die의 모습을 보던 YellOw는 순간 전쟁터에서 봤던, 테란 꼬맹이가 생각났다. 그 폐허 속에서도
반짝거리며, 강한 눈을 하고 있던 어린아이. 그 아이의 잠재력은 대단했다. 예전 프로토스족의 어린아이 둘을 살렸을 때 느꼈던 그런
불안감.
내가 살린 이 아이들이 훗날 저그의 위험이 될 수도 있겠구나.
아마 지금의 그 어린아이들이 성장하여 실세가 되는 날에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YellOw는 예상할 수 있었다.
BoxeR와 YellOw, Nal_ra와 Reach의 시대와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시대가 올 것임을. 허나 그
때문에 어린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YellOw가 지닌바 신념이었다.
“어리석구나,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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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장편계획이었으나 뒷편을 안적고 있으므로 우선은 단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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